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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플레이리스트: 왜 불러

46번째 푸른 봄

by 깡대지


"영순아, 인나라잉. 우리 보고 싶었제?"

"우린 니가 참말로 보고 싶어불었다잉. 얼른 좀 인나봐라잉."

"빨리 우리 있는 데로 와뿌라잉. 인자 우리 떨어지지 말자제."

"그동안 하고 싶은 말도 산더미로 쌓여불었제라. 얼굴 좀 보자잉."

"……헉!"


영순은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목소리들에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다가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봉천동 집 천장이 아니었다. 누리끼리하고 반쯤은 곰팡이가 핀 낡은 천장이었지만 영순은 매일 그 천장을 바라보며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영순의 두 눈에 들어오는 낯선 천장은 새하얀 벽지를 바른 천장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친숙하기도 했다.


"… 꿈이 아니야. 진짜야…."


영순은 천장을 향해 손을 길게 뻗어보았다. 희고 고운 손등이 두 눈에 들어왔다. 주름지고 움푹 파인 채 군데군데 검버섯이 피었던 본래 영순의 손등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영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다시 그 목소리들이 몰려왔다.


'영순아'

'으으. 그만 좀 해. 나는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복잡하다고. 이 목소리들은 또 뭐야?'


영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곳,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온 뒤 틈만 나면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들 때문에 괴로웠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들 투성이인 가운데 콩, 무언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영순이 놀라 창문을 덜컥 열자 우렁찬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영순이 누님~!"

"… 누구?"


이층 집에서 골목길을 내려다보는 영순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하는 앳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있었다. 어딘가 친숙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던 목소리 중 하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신기하게 남자가 말을 걸자 영순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목소리가 그쳤다.


"나여, 춘재~!! 박춘재! 누님이 갑자기 그래 쓰러져버리고 다방에 계속 안 나오길래 걱정돼서 왔지라."

"춘재?"

"그려. 후딱 나온나. 아부지한테 딴 소리 허고 여기 몰래 와부렀당께."


춘재라는 이름을 들으니 어딘가 묻혀있던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뿌옇기만 했던 화면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영순은 일단 잠깐 기다리라고 얼버무리고 바깥에 나갈 채비를 하려 했다. 그런데 춘재가 그런 영순을 붙잡았다.


"어허~! 그라고 언제 나올랑가? 자, 이 춘재가 싹 다 받아줄 테니께, 이 동해바다만큼 넓은 가슴으로 퐁당 뛰어뿌라잉~!"

"여, 여기서? 2층인데?"

"아따, 누님네 엄니 엄청 깐깐하셔서 어디 간다카면 꼬치꼬치 캐물어불 거 아녀. 나가 싹 다 받아줄랑께 걱정 말고 퐁당 뛰어뿌라잉."

"그건 그래."



영순은 꼬부랑 할머니에서 갑자기 한창때의 젊은 아가씨가 된 자신을 받아들이질 못하고 그만 다방에서 혼절했다. 이후 한참을 영순이 화장실에서 안 나오는 걸 이상히 여긴 동료 레지 미자가 바닥에 쓰러진 영순을 보고 깜짝 놀라 사장에게 고했다. 그 뒤로 영순은 곧바로 집에 실려 왔고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자 환자 취급을 받아 며칠째 집에서 강제 요양 중인 상황이었다.


"아따, 뭐 혀라. 얼릉 뛰어부러잉. 나는 튼튼허니께 근심허덜 말고."

"……."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일단 부딪치지 않고서는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영순은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창밖으로 몸을 그대로 내던졌다.

턱. 제대로 춘재의 품에 뛰어들었나 싶던 찰나, 우당탕탕. 춘재와 함께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본인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춘재의 품 안은 여리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영순의 허리를 감싼 두 팔은 단단히 감겨 있었다.


"괘, 괜찮아?"

"이이, 걱정 허지 말랑께. 폼 좀 잡으려다 모냥 빠져뿌렀네잉. 어서 가자니라."

"어, 어디 가는데?"

"가보면 안다잉."


춘재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몸을 일으켜 영순의 팔을 잡아당겼다. 영순은 잠옷 차림으로 춘재가 이끄는 대로 온 동네를 쏘다녔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으리으리한 매장과 상점이 빽빽이 들어 찬 번화가인 충장로, 졸졸 흐르는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 뒤에 우직하게 묵묵히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무등산이 눈에 들어왔다.


7월의 한여름 싱그러운 햇살을 받아 무등산은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영순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광경이라 생각했던 그 모습을 멀거니 서서 지켜보았다. 흐릿했던, 아득하기만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래, 이곳이었다.


찬란한 태양 빛을 한 몸에 받는 도시. 어디를 가든, 어디서 보든 빛이 가득한 곳이라 이름부터 '빛고을'이라 불린 광주. 이곳이 영순이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을 잊고 있었을까. 어쩌다 잊어버렸을까. 그렇게 상념에 잠길 때였다.


"아, 차가워!"


갑자기 어디선가 물벼락이 날아들어 영순의 몸을 차갑게 적셨다. 범인은 춘재였다. 춘재는 방심하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영순을 보며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하하! 영순이 누님, 정신 놔뿌렀다가 나한테 당해뿌렀제?"

"박춘재, 너! 가만 안 둬!"


영순은 이를 악물고 징검다리에서 광주천 아래로 발목을 담가 개천 표면을 여러 차례 거세게 내려쳐 물장구를 쳤다. 그런 영순을 보고 배를 잡고 깔깔 웃던 춘재는 그대로 물벼락을 삼키고 목이 막혀 컥컥, 헛기침했다. 춘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번엔 영순이 실컷 비웃었다. 그런 영순을 보고 골오른 춘재는 첨벙첨벙 발길을 옮기며 영순을 붙잡으려 들었고 영순은 그걸 보고 달아났다. 그렇게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춘재와 한참을 광주천에서 뛰놀 때였다.



'꼬르륵'


영순의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일어나서 따로 밥도 먹지 않고 춘재가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신 울어대는 배꼽시계가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니건만 영순은 배를 두 팔로 감쌌다.


"하하하! 아따 우리 영순이 누님, 배가 잔뜩 고팠던가벼? 하긴 인자 맛난 거 묵으러 갈 때도 됐지라잉?"

"어? 진짜?"

"그랑께 그랑께. 이 누님이 속고만 살았나? 얼른 가자니께."


그렇게 영순은 또 춘재의 손에 붙들려 광주천을 빠져나가 한참을 걸어 시장가에 들어섰다. 농산물, 수산물, 생필품 등 다양한 잡화를 진열해 놓은 좌판이 끝도 없이 양옆으로 늘어진 재래시장이었다. 장 보러 온 아주머니,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놀러 온 학생 등 다양한 행인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시장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영순과 춘재는 한 손에 각각 김밥, 호떡, 어묵, 조각난 무등산 수박이 담긴 컵을 든 채 우물거리며 양동시장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인자 어떠냐? 기분 좀 풀리니께 머리도 환해지제잉?"

"응, 덕분에. 옛날 일도 조금씩 생각나고. 근데 너 진짜 이렇게 종일 나랑 놀러 다녀도 돼?"

"걱정 붙들어매라니께잉. 아부지한테는 내가 잘 말해놨당께. 누님이 얼른 몸 챙기고 다방 나오는 게 더 급한 거 아니겄소. 우리가 뉘간디? 사직골을 주름잡는 음악다방 '빛고운 세라비'의 환상 듀오 아이가. 누님은 그냥 몸 생각만 혀. 인자 안 들리는 거제잉?"

"뭐가?"


영순은 김밥을 한 입 또 베어 물며 천연덕스럽게 춘재에게 물어봤다. 춘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영순을 마주 보면서 답했다.


"아따 누님이 여기 갑작스럽게 온 뒤로 자꾸 머릿속에 누군지 모를 목소리들이 자꾸 말 걸어온다칸다며. 인자 괜찮은 거여?"

"어, 그러고 보니…."


춘재와 종일 온갖 데를 누비고 다니다 보니 영순은 눈만 감으면 찾아왔던 머릿속 목소리들의 공격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영순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


"인자 안 들리나 보구만잉. 잘됐당께. 앞으로 또 그런 소리 들리믄 노래라도 불러보랑께."

"노래? 무슨 노래?"

"뭐 그런 거 있잖여."


춘재는 갑자기 가는 사람을 왜 붙잡느냐는 내용인 송창식의 '왜 불러'를 간드러지게 꺾으며 불렀다. 능청스러운 춘재의 노래에 영순은 웃음보가 터졌다. 춘재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영순을 계속해서 부르던 머리 속에 울리던 그 목소리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 목소리들이 영순을 서울 봉천동에서 광주로 불러낸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런 의문을 지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너 정말 노래 잘 부른다. 나중에 미스터 트롯에 나가도 되겠어."

"미스터 뭐…?"

"그 왜 있잖아. 임영웅 나온 거. 몰라?"

"임영웅? 갸가 누군데 그려? 갸도 가수여?"


임영웅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는 춘재를 보고 영순은 당황했다. 아니, 지금 대한민국에서 임영웅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다 영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춘재야…. 지금이 몇 년 도지?"

"뭔 뚱딴지같은 소리당가. 지금 79년 아이가. 누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녀?"

"79년? 1979년?"


그 말에 춘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영순은 사색이 되었다. 그제야 또렷하게 자신이 과거로 왔다는 사실이 체감됐다. 1979년이면, 영순이 딱 스물다섯이 되었던 해였다. 그때였다.


유려한 통기타 선율과 함께 부드럽게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한 우리의 이야기가 바람같이 지난다 해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 감미롭게만 들렸다. 누구나 한 번에 사로잡을 만한 미성이었다. 영순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곳에 쏠렸다.


'양동축산상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 앞에서 한 잘생기고 훤칠한 청년이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청년의 주위를 세대를 초월한 다수의 여성들이 에워싼 채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춘재가 이를 갈았다.


"아따, 저 형님이 또 잘난 척 나서불었네잉. 맨날 시선 끌어먹고는 말여."

"저 사람이… 누군데?"


영순 역시 잘생긴 그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춘재에게 물었다. 춘재는 제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른 여자들처럼 새빨간 홍조를 띠며 노래하는 청년에게 정신 팔린 영순을 보고 뾰로통해져 답했다.


"나가 사직골 남진이면 저 형님은 나훈아제."

"나훈아?"

"어, 그 잘난 유광철이제잉."


유광철. 그 이름 세 글자를 듣는 순간 영순의 마음이 순간 갑자기 화해졌다.


★ DJ's Pick

송창식-왜 불러 (1975년)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로 활동하다 1970년에 솔로로 전향한 당대의 가장 성공한 포크 가수 중 한 명인 송창식이 1975년에 발표한 노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수록곡으로 사용됐다. 한 때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됐는데 영화 속에서 청년들이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장면에서 활용됐기 때문이다.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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