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푸른 봄
광철이 흥얼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 노랫말이 영순의 가슴속에 박혀 들었다. 한 글자씩, 또렷하게. 광철의 노래를 들으면서 영순의 머릿속에는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골목을 적시는 빗속을 추적추적 함께 뛰놀던 영순과 광철. 찻집 안에서 광주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보고 내내 감탄했던 영순과 광철. 음악감상실에서 밤늦도록 서로 LP를 돌려 들으며 서로 어떤 가수의 어떤 노래가 더 좋다고 목 놓아 다퉜던 영순과 광철.
그 노랫말이 마음속에 한 마디씩 박히는 동안 그렇게 새까맣게 잊고 있던 추억의 파편들이 한 조각씩 떠올랐다. 그리고 목울대까지 차마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넘실거렸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영순은 알 수 없었다. 그리움, 애틋함, 아련함, 아득함. 당장 떠오르는 그 어떤 이름을 붙여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영순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들썩이다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반대편 뺨 위에도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숨을 쌕쌕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한 영순을 보고 옆에 서 있던 춘재가 당황했다.
"여, 영순이 누님, 시방 우는 거여?"
"……."
하지만 영순의 귀에는 춘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주변에 그 어떤 풍경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오직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광철의 모습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건 광철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를 둘러싼 군중 속에서 영순을 찾아내 정확히 두 눈을 마주쳤다. 영순의 새까만 눈동자와 광철의 담갈색 눈동자가 서로의 형상을 또렷이 담고 있었다.
광철은 통기타를 연주하며 한 소절씩 또박또박 부르며 군중을 헤치고 영순에게 한 발자국 씩 다가왔다. 마치 영순이 70세가 되기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던, 공백으로 남아있던 45년의 간극을 건너오는 것만 같았다. 영순은 비록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자신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듯이. 광철이 끝도 없이 '언제라도 난 안 잊겠다'라고 반복적으로 되뇌며 영순에게 주문을 거는 것만 같았다.
영순은 그런 광철을 보고 한 마디도 채 꺼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광철은 영순의 바로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영순이 이유도 모르는 채 그를 보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반면 광철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동시장을 감싸고 있는 햇빛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광철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단순히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모창에 지나지 않았다. 영순에게는 분명히 존재했던 광철과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광철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부르며 엄지로 영순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쳐 닦았다.
"자, 동작 그만!"
춘재가 영순과 광철 사이에 끼어들어 한 뼘 남짓 떨어져 있던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영순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순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던 춘재는 온 데 간 데 없고 광철을 최대한 흘겨보며 아니꼬워하는 춘재가 서 있었다. 춘재가 그러거나 말거나 통기타를 매고 있는 광철은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였다.
"아따 성님, 장사는 아예 접어뿌고 기타나 퉁기면서 계집애들 꼬시는 게 직업이더랑가요?"
"나는 기타 치면서 손님들 웃게 허고 고기까지 팔아먹는 게 일이여. 근디 춘재 니야말로 시방 다방은 내팽개쳐 놓고 여기서 뭣허고 있당가?"
"나는 오늘 합법적으로 아부지한테 휴가 하루 따내서 쉬는 거랑께요. 성님은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고기나 파쇼잉."
"영순인 다 젖은 생쥐 꼴로 맹글어 놓고, 하릴도 없이 싸돌아댕기는 게 니한텐 쉰다는 거여?"
"에취!"
광철과 춘재가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는 동안 영순은 광주천에서 실컷 물장구를 친 여파로 다시 오한이 나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춘재와 언쟁을 벌이던 광철은 가게 안으로 돌아가 벽에 걸려있던 외투를 꺼내와 영순의 어깨 위를 덮어주었다. 그 모습은 광철 주변을 에워싸던 수많은 여성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영순아, 한여름에 감기 걸리지 말고 몸 따시게 혀라잉."
"고, 고마워요, 오빠…."
광철의 손길에 영순이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선 수줍게 답했다. 본능적으로 광철이 연상이란 점을 순간적으로 기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서 제대로 뿔이 난 춘재는 광철이 영순에게 덮어준 외투를 벗겨 광철에게 도로 건넸다. 그러고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영순의 어깨에 걸쳤다.
"영순이 누님은 내가 따시게 해 드릴 테니께, 성님은 장사나 잘 허쇼잉. 누님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가봅시다잉."
"아따 니 잠바가 영순이한테는 허벌나게 커서 안 맞는당께. 영순아, 그거 벗고 이거 걸쳐라이."
광철은 그렇게 대꾸하면서 헐렁해서 흘러내리는 춘재의 재킷을 벗겨내 춘재에게 도로 던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자신의 외투로 영순의 두 어깨를 감쌌다. 영순은 자신을 다정히 어루만지는 광철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광철이 걸친 외투를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춘재는 이를 뽀득 갈았다. 춘재는 영순의 손목을 잡아끌고 재촉했다.
"영순이 누님, 광철이 성님 바쁘니께 이제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십더잉."
"으, 응. 알았어. 광철이 오빠! 또 봐요!"
"그래, 영순아. 언제든 또 와라, 춘재는 빼고잉."
광철은 능글거리며 춘재의 속을 끝까지 벅벅 긁었다. 영순은 그럼에도 광철이 다음을 기약했다는 데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양동축산상회' 앞을 둘러싸던 소녀 무리는 광철에게 따지듯이 되물었다.
"광철 오라버니, 저 계집애는 누구여라? 설마 애인은 아니제잉?"
"저런 가시나가 오라버니 애인이라믄, 나 진짜 너무 섭섭하당께."
춘재의 억센 손길에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광철과 한 무리의 처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 멀어졌지만 광철은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광철과 다시 만났다는 것, 그로 인해 그동안 닫혀있던 과거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영순에게는 수확이 있었다.
탁.
"똑바로 불어라! 이 가시나야!! 광철 오라버니를 대체 어떻게 꼬셨는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영순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광철과 춘재를 만난 뒤 다시 몸을 추스른 영순은 꽃단장을 하고 다방 레지로서 음악다방 '빛고운 세라비'에 출근했다. 아직은 서울 봉천동에 살던 70세 요양보호사로서의 삶이 더 익숙했지만 2025년의 서울로 돌아갈 방법을 알 수 없었기에 일단은 현재의 생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레지로서의 생활은 서툴지만 차즘 적응하려고 노력하던 찰나였다. 평소처럼 출근해 손님이 시킨 다방 커피를 내왔지만, 손님은 영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뜸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화부터 냈다. 손님은 도끼눈을 뜬 채 영순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 손님. 제, 제가 누굴 꼬시다뇨.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녀, 양동시장 바닥에 소문이 다 퍼졌당께!"
"아서라, 향미야. 여기 다방잉께 그만 허라잉."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는 향미를 옆에 앉은 동갑내기 총각이 말리기에 급급했다. 더벅머리에 두꺼운 잠자리 안경을 쓴 청년이었다. 하지만 흥분한 향미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거 놔라, 권동오. 나 오늘 이 계집애랑 끝장을 보아야겠다니까."
"끝장은 무슨 끝장을 본다는 거야?"
"아따, 그럼 이 불여시를 그냥 두고 보라고?"
가만히 듣자 하니 사람을 자꾸 멀쩡한 남자를 꾀어낸 불여우로 몰아가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순의 표정도 차츰 굳어갔다.
"이놈의 지지배가 어르신한테 어디 건방지게 말대꾸야? 불여우는 광철 오빠한테 꼬리 한 번 쳐보고 싶은 너겠지, 서향미."
영순은 순간적으로 욱해서 손에 들고 있던 쟁반으로 향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영순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향미가 동오와 함께 다방에 함께 걸어 들어와 자신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커피를 주문할 때만 해도 향미가 대체 누군지 왜 그러는지 몰라 주눅 들었던 영순이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이렇게 되받아쳤는지 영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영순의 무의식은 과거의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 이 기집애 행패 부리는 거 좀 보소잉! 니 손님한테 장사를 이라고 해도 되겄냐?"
"손님이 손님다워야 손님 대접을 하지. 너야말로 계속 장사 이렇게 방해할 거면 나가줄래?"
"왐마야, 동오야. 니 이 기집애 말하는 거 들었냐? 손님을 아주 이겨뿔라 카네잉?"
"향미야, 솔직히 니가 선 좀 넘어뿌렀다 아이라. 사람들 다 여기 쳐다본다잉. 좀 참으라잉."
동오마저 자신의 편을 안 들고 타이르자 향미는 성을 내며 난동을 부렸다. 그런 향미를 보고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영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향미는 그런 영순을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 거그 이제 좀 진정됐당가? 계속 해도 되겄소?"
다방 한가운데 위치한 뮤직박스 앞에서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놓고 돌리고 있던 춘재가 향미와 동오가 앉은 테이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채 물었다. 춘재는 DJ로써 한창 맛깔나게 신청곡 관련 사연을 읊조리다가 향미가 영순에게 시비를 걸며 분위기가 깨져 시큰둥한 상태였다. 잔뜩 이골이 나 씩씩거리던 향미는 춘재가 말을 걸자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DJ 박! 요즘 좋아하는 여자 하나 생겨뿌른 거 아녀잉~?"
향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좌중의 이목이 갑자기 춘재에게 쏠렸다. 춘재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순진무구하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영순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시, 시방 향미 누님, 그게 무슨 헛소리여? 그런 거 아녀라잉~"
"아니긴, 내가 누군지 다 알고 있당께~"
향미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씩 웃었다. 춘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어떻게든 화제 방향을 돌리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 모습이 욕조에 빠져 허둥지둥 빠져나가려 하는 고양이처럼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조, 좋아하는 사람 얘기 나와불었는디, 여기 형님 누님들 다 그런 사람 하나씩은 맘에 품고 있제잉? 거그 딱 어울리는 쌈박한 노래가 있당께~"
"나가 먼저 말 꺼냈으니께, 먼저 신청곡 받아부러잉~"
"미국서 제일 잘 나가는 멋져부런 빌리 조엘 형님 있잖여잉? 그 형님이 마누라 생일 맞춰서 만든 노래가 하나 있당께. '니는 굳이 안 변해도 돼,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가 젤로 이쁘다잉~' 하고 불러주는, 그런 달달한 노래여~"
"아따, 그랑께 그런 건 집어치우고, 저기 누님이 말하는 신청곡 얼른 받아부러잉~"
정장을 입은 한 남자 손님이 춘재의 멘트를 끊고 외치자 좌중이 전부 동조했다. 관객은 모두 이미 춘재의 추천곡보다는 향미의 신청곡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 춘재는 청중의 요청은 무시하고 태연하게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이 실린 LP판으로 교체하려고 했지만 대중의 반발이 거셌다. 아무리 그래도 분위기 전환 시도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너그가 좋아하는 그 누님 있잖여, 딴 남정네 생긴 거 같은디… 배호의 배신자 좀 틀어봐라잉. 니랑 딱 맞제~ 더벅머리인 것도 그렇고잉~"
"딴 남자… 딴 남자라니잉? 향미 누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당가~?"
향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춘재가 동요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 덕에 의자가 뒤로 자빠져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일동 웃음보를 터뜨렸다. 영순은 자신의 옆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상황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영순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1979년 광주를 빛낸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DJ's Pick
윤형주-우리들의 이야기 (1972년)
송창식과 '트윈폴리오'란 듀엣을 결성해 1960년대 후반을 휩쓸었던 윤형주가 솔로로 전향한 이후 발표한 노래. 피지 전통 가요인 isa lei(이사 레이)의 번안곡이다. isa lei는 피지에서는 헤어질 때 부르는 노래다. 토마스라는 청년이 isa lei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로 결혼을 못하게 되자 헤어지면서 겪은 슬픔을 표현한 노래다. 이 노래는 훗날 1967년 호주의 4인조 혼성그룹 시커스(Seekers)가 불러 유명세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