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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플레이리스트: 방랑자

46번째 푸른 봄

by 깡대지

영순이 광주로 돌아온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광주의 길거리를 뒤덮으며 작열하는 8월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25살의 육체도 제법 익숙해졌다. 역시 늙은 몸보다는 젊은 신체가 더 좋았다. 아무리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고, 허리를 아무리 여러 번 굽혀도 쑤시지도 않았다. 아무리 고된 일을 많이 해도 조금만 쉬어도 몸이 금방 회복됐다. 25세는 70세가 느꼈던 피로의 절반도 느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식사도, 소화도 쉬웠다.


무엇보다 그 사고를 당하기 전이어서 그런 지도 몰랐지만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머리가 항상 상쾌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영순에게는 요양보호사보다는 음악다방 레지가 더 적성에 맞는 옷 같았다. 좋아하는 옛날 노래를 실컷 들으면서 손님들과 실컷 수다도 떨고 커피 나르는 걸 취미가 아니라 일로써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니. 영순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영순은 아직 완전히 옛 기억을 되찾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조심스레 지금까지 한 달 동안 과거로 돌아와 지내며 체득한 걸 되새겨봤다. 영순은 광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가족으로는 양친과 친할머니, 두 동생이 있다. 전남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뒤로 곧바로 ‘빛고운 세라비’에 취직해 레지가 된 지 2년 차가 됐다.


영순은 교육자에는 전혀 뜻이 없었지만 조선대학교 부속 중학교 국어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는 부친 양필호의 의사로 어쩔 수 없이 관련 학과로 진학했다.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 낳기 전까지 가장 무난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 교사라는 부친의 의지 때문이었다. 다만 양친의 확고한 의지도 대중음악에 대한 영순의 집념을 꺾지 못해 다방 레지가 되는 걸 막지는 못 했다.


광주에 이렇게 버젓이 원래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왜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었다. 70세가 된 영순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자녀도 없었다. 그래서 봉천동에서 현재까지 독거노인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원래 가족들이 나쁜 사람들인 것도 아닌데 왜 45년 동안 전혀 교류가 없었는지 영순은 의문이 들었다.


“이거 아냐!! 아냐!! 살려줘요, 살려줘!! 엄마!! 저 마녀가, 저 마녀가 나 팔아먹으려고 그런다!! 일본 순사 놈들한테 팔아먹으려고 한다!!”

“아니요. 어무이, 일본 순사 놈들 이제 없어요. 약 묵을 시간이라 그러요. 약 묵어야죠.”


영순의 친할머니 최말숙은 중증 치매였다. 그래서 며느리인 영순의 어머니 신금자가 고깝지 않은 행동을 한다 싶으면 발작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러댔다. 가족들은 그런 할머니를 진정시키는 데 한참을 걸려 진땀을 빼고는 했다. 영순 가족들의 일상 중 하나는 툭하면 고함지르고 역정을 내는 할머니로 인해 이웃들에게 사과하러 다니는 게 예삿일이었다.


“아이고, 우리 할머니. 또 순사 놈들이 잡으러 왔대?”


말숙이 집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약 먹기 싫다고 몸부림치고 금자가 그를 말리며 실랑이를 벌일 때 영순이 허허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말숙은 영순이 두 눈을 다정히 마주치자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할머니, 무슨 일 있어?”

“저 년, 저, 저 년이 나를 순사 놈들한테 팔아먹으려고 난리여!!”

“순사 놈들한테? 저런~ 걱정 마셔. 내가 순사 놈들 만나도 살아남는 데는 도사야!”

“어, 어떻게?”


영순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말숙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말숙의 관심사는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다급하다는 듯이 영순의 두 팔을 부여잡고 물었다.


“순사 놈들은 쓴 걸 싫어하거든. 약처럼 쓴 냄새나면 코를 이렇게 부여잡고 막 도망가.”


영순은 천천히 한 글자씩 내뱉으며 과장된 몸짓을 섞어 설명했다. 그 말에 말숙의 두 눈이 또렷해졌다. 말숙은 영순을 보고 천천히 되물었다.


“그, 그럼 약을 먹으면 순사 놈들이 도망가는 것이여?”

“응. 속고만 살았어? 할머니. 평소에 다리랑 허리 쑤시고 몸 가누기 힘들지?”

“맞아. 어, 어떻게 알았어?”

“나도 할머니니까 잘 알지. 저 약 잘 먹으면 그런 거 싹 다 나아. 나 봐. 튼튼해졌지?”


영순은 신체 부위를 하나씩 짚으며 말숙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마지막에는 어깨를 돌리며 말숙에게 자신의 건강미를 자랑했다. 말숙은 그런 영순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순은 순해진 말숙을 보고 어서 약 먹자고 달랬다. 그러자 말숙은 금자가 들고 있는 약 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목구멍 너머로 들이부었다. 그러다 이내 너무 쓰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부렸다.


“아유, 우리 할머니, 참 잘했어요. 자, 여기 물 천천히 마셔.”


영순은 익숙하다는 듯이 말숙 등을 토닥이며 물컵을 건네 천천히 마시도록 거들었다. 이어서 영순은 손뼉을 마주치며 '별나라 삼총사'를 부르면서 말숙이 안방으로 들어가도록 유인했다. '별나라 삼총사'는 7월 말에 개봉한 만화영화였는데 말숙이 오래간만에 정신이 말짱해졌을 때 금자와 영순, 영자가 함께 광주극장에서 관람한 영화였다. 호세, 땅딸이, 꺾달이 등 세 친구가 우주를 누비며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인데 영화롤 보고 난 후 말숙이 하루 종일 주제가를 흥얼거릴 정도로 푹 빠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 주제가를 부르고 나면 말숙이 고집 피우지 않고 잘 따르는 편이었다.


“참말로 신기허네, 치매 심한 저 할머니를 우떻게 다룬 거여?”

“식은 죽 먹기지. 요양보호사로 일한 지가 몇 년인데.”

“요양보호사? 그게 뭔디라? 니 다방 레지 말고 딴 일도 허냐?”


엄마의 질문에 영순은 순간 아차 싶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망설였다. 사실 엄마 큰 딸은 저 먼 미래에서 왔고 알맹이는 70세 할머니라는 걸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이해가 가는 영역이긴 할까.


“생각혀보면 니 요즘 영 수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녀. 첨엔 식구들 얼굴도 못 알아보더니, 서울에 한 번 가본 게 다인 것이 서울말을 허고, 아까도 그렇고 지가 할머니라 카질 않나… 니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녀?”

“엄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난 여기 사람이 아냐.”

“시방 그게 뭔 소리당가?”


금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영순을 빤히 쳐다봤다. 영순은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떻게 돌려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래에서 왔어. 원래 2025년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고. 나도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건지는 몰라. 그리고 나 옛날에 사고를 당한 건지 뭔지 옛날 일을 하나도 기억 못 해.”

“니 시방 뭐 잘못 묵었냐?”


금자는 딸을 걱정된다는 낯빛으로 심각하게 바라봤다. 그 모습에 영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역시 쉽게 설명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금자의 심부름으로 충장로에 들러 장을 보고 골목을 거닐면서 영순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인희의 방랑자를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딱 현재 영순의 처지를 빗댄 노래와 같았다. 방랑자. 비록 몸은 1979년 한여름 한복판을 거닐고 있었지만 정신은 2025년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낀 영순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런 처지일지 까마득했다. 영영 이렇게 미래로 돌아가지도, 과거도 기억하지 못한 채 미아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어이, 거기 방랑자! 여기 좀 보지?”

“……?”


영순은 갑작스럽게 들린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우동 마냥 전모를 비뚤어지게 써서 턱 아래 묶고 쨍한 원색의 한복을 걸쳐 입은 한 젊은 여자가 점집 출입문 한 구석에 기대서서 입에는 곰방대를 문 채 영순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영순과 눈이 마주치자 따라 들어오라고 턱으로 문 안쪽을 가리켰다. 그에 영순은 속는 셈 치고 여자를 따라 점집 안으로 들어섰다.


점집 안에는 오색의 현란한 천이 곳곳에 늘어진 채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그 외 다양한 형태의 불교와 도교 속에 등장하는 요괴 형태의 조각상이 곳곳에 즐비했다. 영순은 점집 안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당한 곳에 앉아.”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점집 출입문 맞은편에 놓인 거대하고 화려한 병풍 앞에 높인 탁자 뒤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집 안은 매우 어수선했던 지라 영순은 적당히 발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치우고 간이의자를 빼서 걸터앉았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적당한 호구 잡아 돈 뜯을 생각이었다면 바로 나갈 거니까…!”

“당신 여기 사람 아니지?”

“그걸 어떻게?”


입에 물던 곰방대를 빼낸 여자가 영순의 얼굴로 후하고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영순은 여자가 감 없는 무당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막무가내로 가게 차린 건 아니거든.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다시 원래 세계로 갈 수 있는지나 여기에 왜 온 게 됐는지 같은….”

“마, 맞아요! 일단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건지는 도무지….”

“귀신들과 연이 깊어서 그래. 네 주변에 귀신들이 들러붙어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당은 그렇게 한 마디 던지고는 다시 곰방대를 물며 연기를 폐 속 깊이 빨아들였다. 여자는 영순의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른 곳을 멀거니 쳐다봤다. 영순은 나름대로 무당의 말속에서 머리를 굴려 힌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죽은 사람들이 나를 끌어들인 거란 말이에요?”

“그럴 확률이 커.”

“그게 누군데요? 대체 왜요? 하지만 여긴 저승이 아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영순은 무당의 말을 들을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위해를 가하며 산 적은 없었는데 이런 일이 생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당은 그런 영순과는 다르게 태연 작약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건 말이지…. 나도 몰라….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는 달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너처럼 귀신과 질긴 인연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봐서 분명 연을 맺으면 도움이 되겠다 싶었지.”


무당은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 위 한 구석에 놓여있는 재떨이 위에 곰방대를 톡톡 털었다. 그리고 영순을 정면으로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서는 웃으며 말했다.


“너 과거는 몰라도 미래의 일은 많이 알고 있지? 앞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도록 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과거의 기억이나 널 부른 혼들이 누군지 궁금치 않아? 너도 내가 필요할걸? 특별히 복채는 받지 않을 테니.”

“보아하니 그렇게 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 몸은 곧 거목이 되실 몸이라고. 잘 기억해 두도록 해. 이만 가봐도 좋아.”


영순은 기가 찼다. 물어보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준 것도 아니면서 다짜고짜 자신에게 쓸모가 있으라니. 감은 있는 것 같았지만 저 무당과는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영순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돌아나가는데 무당이 말했다.


“참, 난 해월이야! 선해월! 하지만 넌 나를 무조건 해월선녀님이라 부르도록. 양영순,”

“……!”


관등성명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본명을 입에 담은 해월선녀를 보고 영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해월선녀는 그런 영순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만 장사해야 하니 얼른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영순은 그렇게 점집을 나오고 어딘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막무가내야…. 자기 할 말만 다하고.”

“저, 구두닦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뒤돌아 집으로 향하려는데 이번엔 영순의 앞을 베레모를 푹 눌러써 얼굴을 반쯤 가린 왜소한 중년의 신사가 가로막았다. 영순은 오늘따라 참 다양한 사람들이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어요.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아니지, 영순이. 내가 필요할 텐데?”


그렇게 구두닦이 신사를 뒤로 하고 영순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중년이 갑자기 말을 놓으며 영순을 붙잡았다. 영순이 의아해 고개를 돌리자 신사는 영순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웃어 보였다.


“영순이 내가 이 은혜는 꼭 갚겠다고 했잖아.”


어딘가 익숙한 그 말투. 많이 젊어졌지만 어딘가 낯익은 생김새. 약간 구부정한 서 있는 자세까지. 어딜 봐도 그는 구충복 영감이었다.


★ DJ's Pick

박인희-방랑자 (1976년)

1972년 솔로로 전향한 포크 싱어송라이터 박인희가 1976년 발매한 노래. 박인희는 숙명여자대학고 불문과 졸업 후 이필원과 포크 듀엣 '뜨와에므와(프랑스어로 너와 나라는 뜻)'으로 데뷔 후 많은 사랑을 얻었다. 방랑자는 1970년 이탈리아 가수 지아니 모란디가 발표한 vagabondo(방랑자의)의 번안곡이다. 당대 포크 대부 이정선이 편곡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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