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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플레이리스트: 열아홉 순정

46번째 푸른 봄

by 깡대지

충복을 바라본 영순의 두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깃들었다.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영순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고 영순은 충복에게 다가가 물었다.


“구, 구씨 영감이었어? 여기로 날 부른 게?”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아까 그 무당이 그랬어. 난 귀신과 연이 깊다고…. 내가 여기 오기 직전에 죽은 사람이라면 …구씨 영감뿐이잖아?”


영순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말한 대로 귀신이 영순을 과거로 불러들인 거라면 그 대상은 그날 때마침 목숨이 위태로웠던 충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충복이 죽었고 어떤 이유에선지 영순이 과거로 건너오게 됐던 거라는 결론밖에는 도출할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몰라. 영순이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건지. 나도 왜 여기 있는지도.”

“그게 무슨 소리야? 구씨 영감이 아니면 누가 나를 여기 불렀단 말이야?”

“그날 내가 죽은 건 맞아. 나도 누가 부른 것 같았어. 그래서 눈 떠보니 이 모습이더라고,”


충복의 대답을 듣고 영순은 허탈했다. 충복도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45년 전의 광주로 오게 된 거란 말인가. 과거로 오게 된 비밀을 드디어 푸나 기대에 부풀었던 영순은 시무룩해졌다. 영순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충복은 영순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지금은 몰라도 나도 여기에 온 거 보면 영순에게 뭐든 도움이 되려고 그런 거 아니겠나?”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영순이 원하는 거라면 내 뭐든 직접 해보겠네.”


충복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영순은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바뀌거나 새로워지는 건 없었지만 기운이 났다. 어쨌든 기억 속 공백으로 남아있는 1979년 광주 속 미아로 던져진 게 영순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충복은 영순이 아는 사람 중 유일한 광주 출신 인물이었다.


동향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한 요양보호사와 환자 사이를 넘어 남매처럼 각별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영순은 자신이 광주 출신이란 점 외에는 어릴 적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충복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주머니에서 꺼내주던 광주 이야기가 소중했다.


충장로에서 운영하던 구두닦이 가게 사장 부부 슬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충복은 별다른 특출 난 재주가 없기도 했고 6·25 전쟁으로 손위 형들이 모두 죽어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러다 월남전 참전 후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평생 절었다. 역시나 충장로에서 터를 잡고 운영하던 세탁소 딸과 결혼해 아들 셋, 딸 둘을 낳았다. 허리가 휘도록 일하면서 다섯 명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고이 키워 결혼시켰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장남이 상경해 의사로 자리잡은 뒤로 부모를 모시겠다고 찾아와 환갑이 지나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칠순이 지난 후 처가 갑자기 대장암이 발병해 10여 년간의 투병 끝에 사별했다. 그 과정에서 충복은 점술 등 미신에 빠져들었다. 본인의 건강도 악화되다 보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과 인생 길을 알기 위해 점쟁이에 의존했다.


충복은 주역 등 역술 서적들을 줄줄이 꿰고 다니고 몸이 허락하는 대로 용하다는 소문이 난 서울 곳곳의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적지 않은 돈을 복채로 사용했다. 점술가가 시키는 대로 명줄을 늘리기 위해 개명, 사방에 부적 붙이기, 편식, 특정 색의 옷만 골라 입기 등 온갖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자녀들은 그런 충복에게 너무 미신을 믿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그의 귓가엔 들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치료비 등 드는 돈이 느는데 점쟁이에게 갖다 바치는 돈도 쌓여가니 충복과 언성을 높이다 못해 제 풀에 지친 자녀들은 결국 충복을 요양원으로 보냈다.


점괘에 대한 충복의 기이할 정도로 강한 집착과 맹신은 요양원 내에서도 그를 괴짜 영감으로 취급받게 만들었다. 그나마 충복에게 꾸준히 말벗이 되어주고 성한 구석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로 나약해진 그 옆을 지킨 건 영순뿐이었다. 말년에는 다섯 자녀, 여덟 명의 손자녀, 두 명의 증손자 중 그 누구도 충복을 찾지 않아 더욱더 왜소하고 허름해 보였다.


“여기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전생이랑 똑같아. 얼마 전에 막내가 태어났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충복은 갓난쟁이인 막내딸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충복의 행복하다는 얼굴을 보고 영순의 얼굴엔 순간 씁쓸함이 떠올랐다. 충복의 입으로 직접 자녀들과 척을 지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다 전해 들은 탓이었다. 막내딸은 충복에게 그렇게 생각 없이 살 거면 유산이나 미리 떼어주고 혼자 죽으라고 격앙되어 말다툼할 정도로 사이가 험악했다. 그 말에 격노한 충복은 고함을 치다가 혈압이 순간적으로 급격히 올라 졸도했다. 하지만 지금 충복의 얼굴에는 그런 미래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평온하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영순아, 니 시방 여기서 뭐 하냐?”

영순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광철이 붉은빛이 감도는 육고기가 가득 담긴 봉투를 한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통기타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영순은 광철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광철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영순을 응시했으며 그를 향해 걸어오며 영순과 충복 사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아재는 뉘어? 니 아는 사이라?”

“어…. 그게 그러니까….”


영순은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래에서 같이 시간을 건너온 동지라고 해도 안 믿을 테고, 요양보호사와 환자로 만나 서로 오래 알고 지낸 관계라고 해도 설명은 되지 않을 터였다. 영순이 그렇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충복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광철에게 대답했다.


“우리 가게 오랜 단골이라 잘 알제. 저기 충장로 골목 끝에 있는 구두 가게인께, 잘생긴 총각도 언제 한 번 놀러오랑께. 싸게 해드릴라니께.”


그렇게 충복은 허허실실 웃으며 이제 가게를 보러 가야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영순과 광철 두 사람만 그 자리에 남았다. 영순은 광철과 단둘이 있게 되자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은 마음이 우뚝 솟았다.


“저, 광철 오빠. 나 엄마가 심부름시킨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

“가만 있어봐라 영순아 내가 우리 가게서 소고기 안심 좀 싸왔당께.”

“고마워, 오빠. 잘 먹을게. 엄마가 좋아할 거야.”


광철이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영순에게 건넸다. 영순은 광철에게서 봉투를 건네받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광철이 순간적으로 영순의 손목을 잡았다. 영순은 순간적으로 놀라 그대로 광철을 뒤돌아봤다. 광철의 얼굴에는 섭섭함이 묻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영순은 잘못한 것도 없건만 괜스레 밀려드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광철은 영순이 머뭇거리자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 붙잡았던 영순의 손목을 놓았다. 광철의 체온이 특별히 더 높은 것도 아닌데 영순은 광철에게 잡혔던 손목 부근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영순아, 내가 니한테 뭔 잘못한 거 있냐? 와 자꾸 나를 피허는디?”

“아, 아냐. 내가 피하기는 무슨? 그런 거 아냐.”


영순은 서운함을 티 내는 광철에게 고개를 저어가며 부정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인하지 못했다. 광철과 있으면 어딘가 불편했다. 처음 그와 재회했을 때 머릿속에 파도치던 그 감정과 기억의 파노라마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 중 하나라 하더라도 그런 감정의 파장을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광철과 이 이상으로 엮이면 그가 하도 주변 여성들의 주목과 이목을 받다 보니 향미처럼 영순을 질투하거나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향미는 단순히 영순의 연적이라기보다는 악우에 가까웠지만. 영순은 기억이 아직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는 광철과 되도록 거리를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여, 시방도 날 불편해하는 게 다 티 나는데, 아직도 옛날 일 생각 안 나는겨?”

“응. 그런 것도 있고…. 오빠도 장사하느라 바쁘잖아.”

“하, 아무래도 안 되것네. 너 오늘 다방 쉬는 거 맞제? 잠깐 나랑 어디 좀 같이 가불자잉.”


광철은 영순의 팔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영순은 당황한 채 어디로 가는 거냐고 광철에게 되물었지만 광철은 일단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충장로 여기저기를 미로처럼 돌아다니다가 광철이 걸음을 멈췄다. 그에 덩달아 따라가던 영순 역시 발걸음을 도중에 멈추다 보니 반동으로 광철에게 몸을 부딪쳤다. 영순은 황급히 사과해 뒤로 물러나며 광철과 간격을 벌렸다. 광철은 그런 영순에게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너 여그가 어딘지 기억나냐?”

“여기…? 극장이잖아?”


영순은 눈앞에 펼쳐진 4층 단관의 광주극장의 외관을 보고 입을 열었다. 물감으로 채색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사랑의 조건’ 포스터가 정중앙에 박힌 채 눈길을 끌었다. 영순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설립된 광주극장은 영순은 물론 친구들과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서린 장소였다. 광철은 얼른 들어가자고 영순의 팔목을 붙잡고 그 안으로 이끌었다.


극장 내부는 예스러운 정취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극장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영순의 머릿속에는 친구들과 광주극장에 영화를 보러 와 깔깔거리며 웃음보를 터뜨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광철은 영순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복도 한 구석에 테이블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휴게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자리에 광철과 영순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긴 왜 온 거야? 보고 싶은 영화라도 있었던 거야?”

“니가 애 때 좋아하던 데잖여~ 여기 자주 오던 거 기억 안 나냐?”


영순은 그 말에 휴게실 근방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일제 강점기에 건축되어 개관한 지 40년이 지난 오랜 극장만이 갖고 있는 향수와 아늑함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부모 손에 이끌려 와 800석이 족히 넘는 객석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 경험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영순은 틈만 나면 극장에 가는 걸 좋아했다. 아직 나이 어린 학생이라는 이유로 영화를 볼 수 없다며 자주 쫓겨나기도 했지만 그저 그 공간 안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자주 있던 사람 중에는 광철이 있었다.


“맞아. 어릴 적에 자주 왔었지, 근데 그게 왜?”


광철은 말없이 통기타 가방을 내려놓고 기타를 꺼내더니 익숙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하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반주였다. 그리고 광철은 그 특유의 맑고 고운 미성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울렁거린다는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이었다. 그 가사를 듣는 순간 영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DJ's Pick

이미자-열아홉 순정(1959년)

반야월 작사. 나화랑이 작곡한 이미자의 데뷔곡. 노래 발표 당시 이미자의 나이가 한국 나이 기준으로 19살이었기 때문에 '열아홉 순정'이 됐다. 이후 동명의 영화 '열아홉 순정' 주제가로도 사용됐다. 발표 당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60년대를 '엘리지의 여왕'으로 제패한 이미자의 밑거름이 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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