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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플레이리스트: 즐거운 잔칫날

46번째 푸른 봄

by 깡대지


광철의 노랫말에 영순은 저도 모르게 따라 읊조렸다. 원곡을 불렀던 낭랑한 이미자의 목소리가 겹치며 영순은 저도 모르게 순식간에 9살 꼬마 시절로 되돌아갔다. 집안 어른들이 모두 웃으며 손뼉을 마주치면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서서 신난 영순이 연신 무슨 뜻인지도 모를 노랫말을 열심히 따라 불렀다.


무릎 아래까지 덮는 치마를 펄럭이며 영순은 자신 있게 열창했다. '열아홉 순정'은 영순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사를 전부 외워 부른 노래였다.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 필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3살 터울 아래 남동생 달호도, 어머니 금자 품에 안겨 잠들어있는 다섯 살 아래 막내 여동생 영자도 어른들의 관심을 사로잡지 못했다. 오직 영순만이 주목받는 순간이었다.


안방에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꼬마 가수는 노래를 마치고 난 뒤에는 그 언젠가 극장에서 봤던 영화 속 여가수처럼 치마 끝을 양손으로 붙잡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인사했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쏟아졌다.


“우리 강아지, 너무 잘한다. 누굴 닮아서 이래 노래도 잘할꼬? 이미자보다도 잘 부르네. 가수 해도 되겠다.”


이 당시에는 정정했던 친할머니 말숙이 어린 영순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두들기며 얼싸안았다. 할머니의 목을 꼭 끌어안고 영순은 활짝 웃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노래는 오롯이 영순이 두 동생을 제치고 어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재주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우리 영순이가 노래를 잘 부르기는 하지만 가수는 생명이 짧잖아요. 우리 영순이는 훌륭한 선생이 되어서 좋은 집안으로 시집갈 겁니다. 그렇지?”


같이 손뼉 마주치면서 영순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하하 호호 웃을 때는 언제고 아버지 필호가 눈치 없이 찬물을 끼얹었지만 말이다.


“……나는 노래가 좋은데.”

“노래는 취미로 하면 되잖니? 영순이 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가수보다 선생님이 되는 게 더 좋아. 이 아버지처럼. 알겠니?”


그렇게 말하며 필호는 영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순은 그 말에 심통이 나 선홍빛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부터 이미 영순의 열망과 집안의 기대치는 어긋나 있었다.


“니 아부지 진짜 꼰대 아냐? 시방 세상이 어떤 땐디, 뭐 좋은 남자 만나는 게 그리 중요하다 그러냐?”

“내 말이. 겨우 그런 걸로 가수는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영순은 책가방을 메고 매일 나란히 등하교를 같이 하는 옆집 사는 친구 향미에게 아버지 험담을 늘어놓았다. 향미는 양 볼에 힘을 주며 막대사탕을 쭙쭙 빨면서 영순에게 맞장구를 쳤다. 영순은 향미만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꼈다.


“아 나 오늘 급한 일 있어불어서 집에는 같이 못 간당께, 그라니 그리 알고 있으랑께.”

“왜 무슨 일 있어?”

“유광철이라고 양동국교에 다니는 잘생긴 오빠가 오늘 양동시장에서 하는 노래자랑에 나온다 카더라. 그거 보러 갈라구 혀.”



영순은 그런 향미에게 바로 뼈저린 배신감을 느꼈다. 좋은 남자 만나는 건 중한 일이 아니라고 했던 게 거짓말같이 향미는 광철을 만날 기대감에 두 뺨을 연한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영순은 혜성과도 같이 등장해 광주의 여심은 순식간에 사로잡은 광철이 궁금해 무작정 하교 후 양동시장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런 생각을 영순만 한 건진 아닌지 노래자랑 무대 부근은 구경 나온 시민들과 광철 얼굴 한 번 보러 몰려온 여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광철이 무대 위에 등장해 덩치에 비해 커다란 통기타를 메고 나와 퉁기며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영순은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왜 향미를 포함해서 수많은 또래 여자애들이 광철에 대한 동경을 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대를 풍미한 인기 배우 신성일을 연상시키는 진한 이목구비와 같은 잘생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기성 가수처럼 여유로운 자세로 선율에 따라 리듬을 타며 스텝을 밟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등 좌중을 압도하는 아우라가 풍겼다. 영순 역시 광철의 자신만만한 가창에 순간 넋을 빼앗겨 멀거니 그저 서서 바라보았다.


동시에 영순은 광철을 보면서 엄청난 격차를 체감했다. 라디오를 여러 번 돌려 들으며 열아홉 순정 노랫말을 간신히 외워 기억 속 이미자를 흉내 내기 바빴던 영순의 잔재주와는 전혀 달랐다. 문득 예인이란, 가인이란 저런 끼와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단순히 커서 이미자와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나마 꿈꾸는 영순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영순의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영겁과 같았지만 찰나에 불과했던 광철의 무대가 어느새 끝났다. 광철은 여유롭게 자신에게 연신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인사한 후에 통기타를 다시 고쳐 맨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영순은 그 틈을 놓칠 새라 황급히 몸을 움직여 광철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어, 어떻게 한 거예요?”


영순의 다급한 질문에 등 돌려 무대를 떠나는 광철이 놀라 뒤돌아봤다. 서로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제대로 인식한 첫 순간이었다.


“방금 부른 브, 블루벨스의 즐거운 잔칫날…!! 그거 원래 4명이서 부른 건데 어떻게 그렇게 혼자서 베이스부터 테너까지 자연스럽게 부른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어요?”



영순은 절박한 마음을 담아 광철에게 물었다. 그녀에게는 광철의 비결이 필요했다. 그런 노래꾼은 날이면 날마다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순도 그 비결을 물어본다고 바로 답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걸 알았지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 재주를 훔치고 싶었다.


광철은 그런 영순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두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고는 영순에게 성큼 다가와 무릎을 반으로 접어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영순의 시선을 마주쳤다.


“궁금해? 궁금하면 이따가 양동레코드로 오랑께.”

“어, 언제요? 몇 시요?”



영순이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지만 광철은 관중의 열광을 뒤로하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영순은 비록 광철에게 대답을 듣지는 못 했지만 양동시장을 빠져나와 주변 어른들에게 지리를 묻고 물어 양동레코드로 먼저 가 있었다. 그곳은 사방에 온갖 LP판이 즐비하게 꽂혀있는 음악 감상실이었다. 영순은 잔뜩 긴장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감상실 출입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광철이 나타났다.


“미안혀, 너무 늦었지? 오래 기다렸당가?”

“아, 아뇨. 괜찮아요.”

“누가 있나 했더니 광철이 아녀? 그 기집애는 니 여자친구냐?”



영순이 왔을 때는 별 대꾸 없던 사장이 광철이 들어오자 고개를 내밀고 질문했다. 광철은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둘러대며 쌍화차 두 잔 달라고 넌지시 부탁했다. 사장은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광철은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영순을 마주 보며 지긋이 웃었다.



“아, 여그는 우리 아부지 친구가 하는 덴께 괜히 긴장하지 마라잉. 난 유광철이라 하는디, 너 이름은 뭐시냐?”

“야, 양영순이요. 광주국민학교 2학년 2반이에요.”

“나보다 좀 어릴 것 같다 생각했는디 진짜 어리네잉. 내는 양동국민학교 5학년이여. 근디 어린 게 음악은 어째 그리 잘 아냐?”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 광철은 6·25 전쟁 시절 미군 부대 인근 밤무대 가수로 섰던 아버지 유창화 밑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갖고 있는 음악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것으로 영순과는 애초에 격이 달랐다. 전쟁통에 코러스 걸로 같은 극장에서 일했던 광철의 어머니 심영과 광철을 속도위반으로 낳고 휴전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창화는 양동시장에 터를 잡고 정육점을 차렸지만 이내 못 이룬 음악의 꿈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런 와중에 장남인 광철이 어릴 때부터 본인보다 더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가수를 딴따라 취급하며 저급하게 보는 영순의 아버지 필호와는 정반대였다. 영순은 광철이 천부적으로 그런 끼를 타고난 것도, 그런 그를 지원하는 집안 환경도 부러웠다.



영순은 집에서는 할머니 말숙과 라디오를 주로 즐겨 들으며 갖은 노래를 섭렵했지만 아버지 필호가 퇴근한 다음에는 음악을 마음 놓고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노래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가수를 가리지 않고 노래를 닥치는 대로 듣는 건 좋아했지만 음악을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광철과 만난 뒤로는 달라졌다.



그날 광철과 안면을 트고 나서는 틈만 나면 양동레코드에서 만나 국내외 가수 음반을 실컷 들으며 아는 게 많은 광철을 통해 음악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양동레코드로 달려가는 게 영순에게는 일상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 되었다. 양동레코드에서 죽치며 전축으로 음반을 늘어지도록 돌려 듣다가 배가 고파지면 광철의 손을 잡고 양동시장 곳곳을 누비며 주전부리를 사 먹고는 했다. 자연스레 영순은 광철의 가족과도 자주 왕래했다.



영순은 광철을 친오빠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집에서는 장녀 노릇을 늘 요구받았던 터라 세 살 위인 광철을 보면 응석을 부릴 수가 있어 좋았다. 광철 역시 영순을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그저 무대에 서 노래하는 자신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다니며 부담스러운 애정 공세를 퍼붓는 소녀 부대와 달리 영순은 광철처럼 노래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영순은 중학생이 되었고, 광철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됐다.



영순은 향미와 함께 아버지 필호가 근무하는 조선대학교 여자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면서 국민학교 재학 당시 삼총사로 같이 다니던 동오와는 갈라졌다. 조선대학교 부속 중학교 여자부가 1961년 여자중학교로 분리됐기 때문이었다. 이는 집에 있어 학교에서도 아버지 필호의 감시가 뒤따를 거란 의미였다. 나이에 비해 의젓해서 늘 티격태격하는 영순과 향미의 사이를 중재하던 동오와 떨어지는 것도 영순에게는 불안 요소였다. 중학교 진학 전 겨울방학, 여느 때처럼 양동레코드에서 죽치던 영순은 좌절한 채 목재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망했어. 내 인생은 끝났어.”

“이제 겨우 중학교 들어가는 아가 무슨 인생이 끝났다 그러냐?”

“내 말 여태까지 뭘로 들었어? 아버지랑 학교까지 같이 다니다니. 이건 죽으라는 소리야.”



영순에게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고민을 광철이 허허실실 웃으며 가벼이 여기는 걸 보고 심통이 났다. 광철은 영순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게 통하지 않자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랑 담판을 미리 지는 게 어떠냐? 중학교 가서도 음악 할 거라고.”



광철의 말을 듣고 영순은 묘안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음악을 향해 품은 꿈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술이나 담배처럼 일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순이 필호 눈을 피해 앨범 수집 등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거실에 식탁을 펼쳐놓고 식사를 하던 중에 필호가 말했다.



“영순이는 다음 달에 국민학교 졸업식 있지? 이제 아버지랑 같은 학교 다니니 더 몸가짐에 신경 써서 아버지 체면 구기지 마라. 동생들한테도 네가 누이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네. 하지만 중학교 가서도 저 음악 계속할 거예요.”

“뭐? 너 아직도 그런 딴따라에 빠져있는 거냐? 중학생이면 공부에 더 매진해야지!”

“공부도 할 거예요! 하지만 노래가 뭐가 나빠요? 나중에 서울 올라가서 가수도 할 건데!”



필호가 주먹으로 식탁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러자 영순을 제외하고 가족 일동이 긴장한 표정으로 필호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필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굳어 있었다. 이는 필호가 보통 격노한 상태가 아님을 뜻했다.


“아버지가 안 된다고 옛날부터 말했지? 넌 이 집 장녀다! 선생님이 돼서 나중에 좋은 집에 시집가 도움이 될 생각은 안 하고 아직도 허황된 소릴 하고 있어? 가창도 형편없으면서!”



그 말에 영순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수저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들바들 떨렸다. 필호의 마지막 말이 심장 한 켠을 날카롭게 찔렀기 때문이었다. 영순은 사실 늘 무의식적으로 의문을 갖고 있었다. 가수가 되기에는 자신이 가진 재주가 부족한 게 아닌지. 아무리 광철에게 노래에 관해 많은 걸 배우고, 다양한 음반을 듣고, 갈고닦아도 영순에게는 광철과 같은 청자를 사로잡을 만한 압도적인 재능이 없었다. 늘 제자리에 고여있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영순은 눈물을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필호와 가족들이 영순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목적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한밤중 골목길을 내키는 대로 뛰었다. 폐 속이 찢어질 것 같을 정도로 차가운 1월 중순의 공기가 들이찼지만 두 볼을 타고 흐르는 영순의 뜨거운 눈물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렇게 턱이 숨에 차도록 한참을 달려 영순이 도달한 곳은 양동레코드 앞이었다. 이미 늦은 밤이라 출입문은 굳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영순은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문을 마구 두들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광철이 영순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순이 아녀? 니, 니가 이 시간에 와 있당가?”

“오빠… 난 안 된대! 어떻게 해도 난 안 된대…. 다 부질없는 짓 이래…!!”



영순은 광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이처럼 크게 우는 영순은 본 적 없는 광철이었지만 집에서 또 음악을 접으라는 호된 소리를 들었을 거라 유추한 그는 말없이 토닥였다. 한참이 지나도 영순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광철은 양동레코드 문을 자물쇠로 잠근 다음 영순의 손을 잡고 길목을 정처 없이 헤맸다. 그렇게 한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던 끝에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문이 굳게 닫힌 광주극장 앞이었다. 실컷 울던 영순은 어느새 개구리처럼 딸꾹질하고 있었다.



“영순아, 오늘은 여기서 좀 시간 때울랑가?”

“여, 여기는 극장 아냐? 이미 문 닫혔는데 어떻게 하려고?”

“나가 예전에 여기서 축제했을 때 공연 몇 번 했었거든? 그때 반응이 겁나 좋았는디, 수위 아저씨가 언제든 오라카면서 여벌 열쇠 하나 줬당께.”


광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점퍼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영순은 그 모습을 보고 어째서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철은 말없이 극장 입구로 다가가 여벌 열쇠를 열쇠구멍에 넣고 돌렸다. 그러자 정말로 문이 열렸다. 영순이 그 모습을 놀라서 황당한 채 쳐다보자 광철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과 적막만이 내려앉은 광주극장 안을 탐험했다. 극장 안을 거닐면서 감정은 차분히 가라앉았으나 곧 끝없는 어둠이 무서워졌다. 그래서 영순은 나지막이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영순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히 외운 노래, '열아홉 순정'이었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흠칫 놀란 광철이 영순을 내려보며 물었다.


“그거 이미자 노래 아녀? 그걸 와 느닷없이 부르고 그라냐?”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운 노래거든. 이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진정돼.”

“그래, 니가 좋으면 됐제. 좋아하는 거 허면 되제.”


그렇게 말하면서 광철은 움츠러든 영순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순간 영순은 흠칫 놀랐지만 광철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함께 ‘열아홉 순정’을 흥얼거리며 어둠에 대한 공포를 쫓았다.


그렇게 몇 번을 극장 안을 돌았을까. 어느새 졸음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휴게실 입구 한 구석에 붙어 앉은 채 주저앉아 나란히 곯아떨어졌다. 광철은 갑자기 코끝을 뚫고 들어오는 매캐한 연기에 숨이 막혀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극장 안이 화마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 DJ's Pick

블루벨즈-즐거운 잔칫날 (1963)

우리나라 최초의 4중 창단인 블루벨즈가 1963년 발표한 독집 앨범 '블루우 벨즈의 걸작집'에 수록된 대표곡. 서양훈이 작사하고 장세용이 작곡한 노래다. 1950년대 말 작곡가 손석우가 당대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손시향(테너), 현양(베이스, 극장무대 가수), 김성배(바리톤), 박일호(멜로디)를 데리고 결성한 게 블루벨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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