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한국 극장 산업 소고
브런치에서는 별로 티를 안 냈다고 생각하지만(라기보다 브런치를 방치해 뒀지만) 나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는 걸 좋아한다. 콘텐츠 생산자이기도 한 나는 문화 콘텐츠를 쪼개보는 것도, 콘텐츠의 유행 흐름도 분석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동안 브런치에 올린 게시글 수가 적은 것만 봐도 알겠지 정작 분석글을 쓰고 싶을 만큼 마음이 동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장문의 글들을 쓸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않고.
하지만 이런 글을 올렸다는 건 깊게 분석할만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귀멸의 칼날'이 관객 수로도, 매출액으로도 2025년 국내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이 됐다는 소식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4일 '귀멸의 칼날:무한성편' 누적 관객 수는 564만 명으로 2위인 좀비딸(563만 명)과는 9331명, 매출액은 77억 원 차이 난다.
11월 26일 개봉하는 '주토피아 2'나 12월 개봉 예정인 '아바타:불과 재'가 이 관객 수를 역전할 가능성도 있지만 국내 박스오피스 집계 이래 일본 영화가 국내 박스오피스 연간 1위를 차지하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무려 애니메이션 영화가 국내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한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확실한 건 앞으로 2025년이 끝나기까지 남은 37일 동안(글 작성 시점 기준) 어떤 한국 영화가 개봉해도 박스오피스 1위를 탈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이건 극장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의 흐름은 이제 다르게 읽어야 한다. 기존의 문법이나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콘텐츠 생산자이기도 하고, 콘텐츠 소비자이기도 한 나는 이 상황이 이대로 한국 영화의 위기가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한국 영화로서는 재앙이라고 할만한 현 상황을 기회로 만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분골쇄신(粉骨碎身,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전력을 다한다는 말) 해야 한다.
봉준호와 박찬욱이라는 한국 영화의 대들보나 마찬가지인 거장들이 발표한 영화 성적이 300만 명에 불과하고(어쩔 수가 없다는 300만 명도 못 넘을 확률이 크다), 특정 시즌을 겨냥한 텐트폴 영화들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여름 방학 특수를 노린 좀비딸은 감동과 유머의 적절한 배합을 통한 적당한 대중성, 정부 영화 할인 쿠폰 배포라는 운이 맞아떨어져 올해 최고 한국 영화 흥행작이 됐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작품이면 보통 천만 관객을 돌파하거나 그에 육박한 성적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좀비딸의 성적도 엄연히 따지면 기대 이하라 할 수 있다.
물론 손익분기점 근처엔 가보지도 못하고 초라하게 막 내린 '전지적 독자 시점'에 비하면 좀비딸은 기본 이상은 해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원작은 성좌물의 트렌드를 만들어 낸 웹소설 업계에서는 걸출한 작품이다. 문제는 영화가 원작을 잘못된 방향으로 각색해 만들었다는 점이며 원작의 마니악적인 면을 덜고 대중성을 더하려고 했던 제작진의 의도가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전독시는 처음 실사영화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모두가 '대체 왜?'라고 물음표를 던졌다.
전독시는 분량도, 세계관도 모두 방대해 기껏 헤야 한 편에 2시간 남짓하는 영화로 담기는 불가능할뿐더러 영화와는 타깃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독시는 훌륭한 IP이긴 하지만 한국 실사 영화로는 맞지 않는다. 웹소설은 특정 연령대의 특정 성별이 좋아하는 세부 장르로 파편화된 지 오래된 업계다. 반면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는 영화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다양한 대중을 타깃으로 삼는 산업이다. 주인공이 갑자기 소설 속에 빙의해 상태창이 뜨고 성좌의 힘을 빌려 게임에 나올 법한 무기를 골라 적과 싸우는 이야기를 비싼 티켓 값을 내고 극장에 보러 갈 일반 관객이 얼마나 될까. 애초 첫 단추인 기획부터 잘못 됐고 완성품은 결국 잘못된 기획의 틀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대놓고 추석 연휴를 겨냥하고 만들어진 기획 영화 보스의 성적은 더 처참하다. 10일이라는 장기 연휴 기간이었는데도 11월 24일 동원 관객 수가 243만 명에 불과하다. 작년 추석 연휴에 개봉한 텐트폴 영화 베테랑 2는 752만 명의 관객을 기록한 것에 비교하면 관객 수가 약 3분의 1에 그친 셈이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 영화로 극장에 걸리면 하나씩은 터졌던 조폭 코미디인데 최종 성적표가 이 모양이면 기획자가 잘려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영화와 극장 산업이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작년에만 해도 파묘와 범죄도시 4라는 두 편의 한국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 되어 연간 최고 히트작 자리를 일본 애니메이션에 넘겨주는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이 정도면 한국 영화의 위기를 넘어 재앙인 상황이다. 그런데 그 원인과 해법을 업계 내부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시선은 적어 보인다.
비싼 영화 티켓 값, OTT의 거대한 영향력, 정부 지원 축소 등 제삼자가 보이게는 업계인들이 반성하기보다는 외부 탓하기 바빠 보인다. 하지만 정말 한국 영화가 바람 앞 촛불과 같은 상태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재밌는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업계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사실 정말 재밌는 영화라면 관객은 아무리 티켓이 비싸고, 버스나 지하철을 한참을 타고 가야 갈 수 있는 극장이라도 가서 본다.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올해 대중문화를 강타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넷플릭스 공개 2개월 만에 극장 개봉했는데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특별관을 힘쓴 'F1 더 무비'만 해도 잘 만든 포뮬러 1 레이싱 장면을 통해 쾌감 하나만은 확실히 선사하니 뒷심을 발휘해 500만 관객을 넘기기도 했다.
적자 보는 영화만 쌓이다 보니 업계는 더욱 위축됐고 현재 한국 영화 투자도 거의 끊겼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관객이 많이 보러 올 상품이 될 수 있을지 더 깊이, 제대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2020년대 일본 영화 인기 트렌드가 된 '귀주톱(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체인소맨)'의 사례를 벤치마킹해도 좋을 것이다.
오랜 만화 독자들 중에선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에 비해 '귀주톱'이 작품성도 별로고 파급력이 약하다고 얕잡아 보는 부류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귀주톱'이 승승장구하는 지금은 '원나블'때와는 시대도 다르거니와 유행 양상이 적지 않다. 파급력도 원나블보다 적다고 볼 수 없다. '귀멸의 칼날:무한성편'은 본국인 일본에서만 역대급 흥행 성적을 쓴 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둔 외국 영화가 됐다. 또 수많은 나라의 박스오피스 1위를 휩쓸었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복병 '체인소맨:레제 편'도 기대 이상의 흥행 기록을 달성해 전 세계에서 1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그럼 왜 '귀주톱'은 어떻게 일본의 새로운 문화 첨병이 되었을까? 세 작품 다 공통점을 꼽자면 원나블처럼 연재 잡지인 소년 점프 공식 우정, 노력, 승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 시원한 액션씬, 매력적인 캐릭터들, 잔혹함과 폭력에도 가감이 없다. 원나블 시대 주인공들이 특정한 목표를 갖고 수련하며 점차 강해져 적들과 맞서는 정석적인 주인공들이 많았다면 귀주톱 주인공들은 그런 전형성에서 비켜가 있다. 귀멸의 칼날의 탄지로는 정석적인 주인공에 가깝지만, 주술회전의 유지는 본인은 선한데 악을 강요하는 주변 환경에 휘말린다는 특징이 있다. 체인소맨의 덴지는 여자와 자보는 게 소원인 일반 소년만화 주인공으로는 낙제점 수준인 주인공이다.
특히 올해 한국 영화계를 휩쓴 '귀멸의 칼날:무한성편'이나 '체인소맨:레제편'을 보면 관객들이 어떤 걸 좋아하고 열광하는지 알 수 있다. 귀멸의 칼날은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이미 여러 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주인공과 대적 무리에 대한 캐릭터 빌드업이 되어 있어 팬층이 쌓여있는 상태라는 점이 일반 한국 영화라는 다르다. 무한성편 역시 완결이 아니라 시리즈의 연장선상인 한 파트였는데도 흥행에 성공한 데는 앞부분을 몰라도 따라갈 수 있는 쉬운 스토리와 명확한 선악 캐릭터, 무엇보다 양질의 액션씬이 한 몫했다. 또한 원작의 검증된 중요 악역 캐릭터의 스토리의 감동을 증폭해 연출한 점은 팬들의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체인소맨:레제편'의 흥행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전작인 애니메이션 1기가 대혹평을 받으면서 흥행 면에서도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대신 레제편은 TV판의 단점과 약점을 모조리 갈아치우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레제라는 강렬한 히로인의 매력과 청춘의 첫사랑과 호쾌한 액션, 파국적인 결말이란 흔치 않은 조합을 성공적으로 배합하면서 반전에 성공했다. 귀주톱 중 유일하게 처지는 것만 같은 체인소맨 IP의 반전을 이뤄낸 레제편의 성공은 업계인이라면 두고두고 분석해 공부할만하다.
이제 제목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귀멸의 칼날이 국내 연간 박스오피스 1위 했다고 한국 영화가 정말 끝났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알 수 없다. 업계가 어떻게 대응책에 나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답은 나와 있다.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맨의 성공 사례처럼 이제는 옛날의 흥행 공식에 기댄 안일하고 낡은 기획의 영화는 통하지 않고 특정한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을 열광하게 만들만한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족시키는 천만 영화의 성공은 이제 허상이 된 것이다.
나는 이제 한국 영화가 이러한 새로운 성공 방식을 받아들여 도약할지, 아니면 옛날의 성공을 잊지 못해 도태될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