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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현 Jun 02. 2023

뜨거운 팥빙수

속 시원한 사랑

첫째 딸의 1학년 생활이 얼마 지나자 학부모 상담이 시작되었다. 그간 어린이집에서 듣던 상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레는 내게 믿는 구석이다. 그래도 첫 학교생활이니,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했다. 선생님의 첫마디는 “어머니 이레는 할 말이 없어요.”였다. 이레가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는 않지만(그저 내 눈에 특별할 뿐, 평범한 아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을 스스로 하는 모범생 어린이다.


예상했던 말들이 오가고 선생님이 한 말씀 덧붙이셨다. “어머니께서 아이를 참 잘 키우셨어요.” 애 셋의 엄마이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나는 나에 대한 평가에 귀가 쫑긋해졌다. 인사치레겠거니 하면서도 10년째 이어지는 육아와 어미 노릇 중 이 한마디가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이 시원했다.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오빠, 오늘 이레네 선생님이 나보고 아이를 참 잘 키우셨다고 하더라, 내가 근래 몇 년 동안 들은 말 중에 제일 위로되는 말이야, 속이 다 시원해.”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반응이 왜 그래?”라고 묻자, 그동안 나는 항상 너에게 ‘네가 최고다.’,  ‘너 때문에 아이들이 이렇게 멋지게 컸다.’ 등등 똑같은 말을 연거푸 해왔는데, 아무 반응 없다가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군다는 것이다.


맞다. 남편은 내게 항상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그 시원한 말들에 왜 이리 무뎠던 건지 잠깐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지만, 어쨌든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냐. 스스로의 가늠과 가족들의 흐릿한 반응만으로 저울질해야 하는 나의 직업 능력에 약간은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점수가 매겨진 느낌이었나 보다. (주부란 객관적 평가를 받기 무척 어려운 직업이다.)



훠얼 훠얼 날아가는 마음을 붙잡아 두고, 오늘 상담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레가 줄넘기를 하나도 못해요. 다른 친구들과 비교되면 스스로 속상해할 수도 있겠어요. 연습 좀 시켜주세요.”라고 하신 선생님 말씀이다. 이런 데서 구멍이 생길 줄이야. 이레를 불러 줄넘기를 시켜봤다. 줄을 앞으로 돌리지만 넘지는 못하는 엇박자의 연속이다. 혹시 가르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유튜브를 켰다. 내가 먼저 해보고 다시 이레를 불러 가르쳐 본다. 단 한 번도 못 넘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도 이레도 어리둥절한 채 바보가 되고 있었다.


아이들 키우기 전엔 무슨 줄넘기까지 학원을 다니나 했는데, 결국 나도 학원행이다. (자고로 겪어보지 않은 건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동네 학원들이 마땅치 않고, 좀 비싸기도 해서 조금 떨어진 곳의 줄넘기 학원을 등록했다.     



이레는 줄넘기 학원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줄넘기도 재미있지만 줄넘기 학원 건물에 이레와 나의 최애 빙수인 클래식 빙수를 파는 아띠제가 있기 때문이다. 학원비가 비싸서 기름값 들여가며 3Km를 왔다 갔다 하는데, 여기에 밥값보다 비싼 18000원짜리 빙수까지? 50분 동안 이레를 기다리면서 차도 한잔하고, 빵도 사고,, 나는 무슨 논리로 여길 다니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학원비에 간식 비용 포함이라고 합리화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레랑 빙수를 처음 먹던 날이었다. 아티제 클래식 빙수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기본에 충실한 빙수이다. 우유 얼음에, 국산 팥과 찹쌀떡 4개가 올라간 단순 그 자체다. 이레는 빙수 위에 올라간 매끈한 찹쌀떡을 먼저 먹고 나서는 밥 먹듯이 팥을 먹어댔다.


“이레야 팥이 그렇게 맛있어?” “응” 평소에도 비비빅을 찾아 편의점을 돌아다니게 만드는 이레는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야무진 입을 오물거렸다. “엄마는 팥 맛은 좋은데 꺼끌꺼끌한 식감은 별로야. 지금도 그냥 어른이니까 먹는 거야.” 이레는 팥에 심취해 무아지경이다. 그런 이레를 보면서도 나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엄마 어릴 때 외할머니가 빙수를 해주면 이 팥을 다 갈아줬어. 그럼 초코시럽처럼 돼” 초코시럽이란 말에 이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레가 얼굴을 가린 엄마 손을 잡아당긴다. “엄마 울어?”          






내가 초중고 약 9년을 살던 집은 옥상 바로 아래의 3층이었다. 옥상 지면의 열기가 그대로 내려와 여름에 견딜 수 없이 덥던 곳. 외할머니가 에어컨을 사주시기 전까지 매년 여름을 나게 해 준 건 엄마의 팥빙수였다. 더운 여름, 엄마는 해마다 큰 냄비에 팥을 쒔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이 찜통인데 팥빙수를 위해 국산 팥을 사다 직접 쑤는 것이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팥은 집안 구석구석을 달궜다. 그래도 하루 고생하면 며칠은 시원한 팥빙수를 먹을 수 있으니 참을만했다.


팥이 준비되면 물고기 모양의 오목한 그릇에 우유를 조금 넣고, 이모가 준 빙수 기계로 간 얼음을 넣는다. 그 위에 팥을 올리고 미숫가루를 뿌리면 끝이다.     


친정에 와서 찾았다. 물고기 그릇!


가리는 게 많은 나는 팥 알 씹히는 걸 싫어했는데, 엄마는 이런 나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식힌 팥의 일부를 갈아서 보관했다. 그리고 내 빙수 그릇에만 초코시럽같이 만든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팥을 덜어주셨다.


더위만 가시는 게 아니라, 내가 120% 만족하는 간! 팥빙수니 속이 개운했다. 이 팥빙수 한 그릇이 그 덥던 날들을 시원했던 기억으로 만들어줬다. 에어컨을 설치한 해에도 엄마는 습관처럼 팥을 쑤었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빙수를 먹다 온몸에 닭살이 돋은 식구들은 모두 방에 들어가 남은 팥빙수를 마저 먹었다. 이상하게 맛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 후론 엄마도 팥 쑤기를 멈추셨다.     



사랑의 속성은 끝이 없지만 사랑은 시원하기도 하다. 지글지글 뜨거운 사랑도 좋다만 시원한 사랑, 마음속까지 시원케 해주는 사랑도 온몸에 사무친다. 사소하지만 진심인 내 취향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사랑 말이다. 시원함은 더위 안에 있을 때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고. 그러고 보니 아이 셋을 키우며(심지어 둘째 셋째는 연년생) 힘들었다고 기억하지만, 남편의 속 시원한 말들이 시원하게 느껴지기엔 나름 내 상황이 그리 무덥진 않았나 보다.



언젠가 엄마에게 나의 외할머니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외할머니는 엄했잖아,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럼 엄마는 언제 엄마의 사랑을 느꼈어?”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여름에 더운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너네 외할머니가 샌들을 사주셨는데, 발가락이 너무 시원한 거야. 그 느낌이 안 잊혀.”     






“엄마 진짜 울어?”

“네 할머니 생각나서,, 나중에 이레도 엄마랑 팥빙수 먹었던 거 생각나겠다 그치?”

줄넘기 수업이 끝나고 땀이 범벅이 되어 먹던 팥빙수. 이레도 뜨거운 온도 속 시원했던 팥빙수를 기억하겠지.     






이레는 9개월 만에 뒤로 뛰기, 벌렸다 모아 뛰기, 가위바위보 스텝, x자 뛰기, 2단 뛰기 등 온갖 방법의 줄넘기를 즐긴다. 줄넘기 학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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