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도 브래지어 하고 싶어
반에서 짓궂은 몇몇 남자애들 때문에 우리 반은 누가 브래지어를 차고 있는지 모두가 알았다. 브래지어를 찬 여자애들은 어딘가 고고했다. 눈빛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일 뿐이지만, 그녀들은 내 세계에서 누구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반면에 나는 아직 가슴이 나오지 않은 애송이였고,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기 위해 엄마한테 '백 원만'을 구걸할 생각만 가득한 시기였다.
내게도 '브래지어 검증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쉬는 시간에 남자 짝꿍이 갑자기 내 등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 이전에는 짝꿍과 신체적으로 접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로 생각했으므로 그 애가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그날은 옷 속에 나시를 입고 있었다. 방어할 새도 없이 짝꿍의 손은 이미 어깨 아래쪽 귀퉁이를 향하고 있었다. 짝꿍의 손이 결국 내 날개뼈 부근에 닿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 브래지어 했어?" 짝꿍은 나시의 끈을 브래지어의 끈으로 착각했다. 나는 당황한 마음을 잽싸게 감췄다. 그리고 브래지어를 찬 여자애들의 고고한 표정을 내 얼굴에 똑같이 만들어 내며 대답했다. "으응~몰라도 돼." 마치 브래지어를 차고 있는 것처럼.
그날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집에 와 부리나케 신발을 벗고 큰 소리로 엄마부터 찾았다.
"엄마! 어디 있어!"
마침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응, 왜 그래?"
"나 브래지어 하고 싶어. 브래지어 사줘."
"그건 가슴이 나와야 하지."
"친구들은 이제 브래지어하고 다닌단 말이야. 나도 브래지어 사줘!"
"친구들은 가슴이 있나 보지."
엄마의 말은 묘하게 약 올랐다. 대체 왜 나는 가슴이 없는거야. 여지껏 귀엽다고 생각했던 젖꼭지가 더 이상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그냥 몹시 초라해 보였다. 계속해서 떼를 써봤지만, 엄마는 완고했다. 엄마의 논리에 의하면 브래지어는 가슴이 나와야만 찰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엄마는 브래지어를 사주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내 짝꿍은 내가 브래지어를 차는 줄 알고 있을텐데...! 나는 절망에 빠졌다. 엄마가 너 자꾸 그러면 용돈 안 줘, 라고 선포했을 때만큼이나 깊은 절망이었다.
다음 날, 나는 또다시 옷 속에 나시를 입고 학교에 갔다. 그다음 날도, 다음 다음 날도, 계속해서 옷 속에 나시를 입고 학교에 갔다. 내 신경은 온통 등짝에 가 있었다. 나도 브래지어를 차는 여자애들처럼 고고한 척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브래지어 안 차는 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일 옷 속에 나시를 입었지만, 나시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가 등 한복판을 만지는 날에는 내가 브래지어를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탄로 날 게 분명했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공포였다.
학교에 있는 동안 짓궂은 친구들로부터 내 등을 사수해야 했다. 친구들에게 절대 등을 보이지 않거나, 의자나 벽 같은 데에 등을 바짝 붙이고 다녔다. 나시 끈이 쏘아 올린 학교생활은 피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희소식이 찾아왔다. 가슴에 작은 몽우리 같은 게 생겨서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 살짝만 눌러도 생전 느껴본 적 없던 통증의 존재감은 날 기쁘게 했다. 그것은 확실한 아픔이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다시 엄마를 찾았다. 이번엔 설렘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엄마! 어디 있어?!"
"응, 왜 그래?"
"나 가슴이 나와서 아파. 이제 브래지어 사줘."
엄마는 내 가슴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응시했다. 평소에도 오바하는 내 성격을 알고 그러는 것 같았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달뜬 마음으로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속으로 강렬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잔뜩 기대에 찬 내 표정을 엄마는 무시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흠... 진짜네..."
그날 저녁, 엄마는 시장에서 브래지어 몇 개를 사 왔다. 나는 드디어 한 명의 고고한 여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째졌다. 엄마가 사 온 브래지어는 시장에서 대충 가장 작은 사이즈로 사온 것 같았다. 내게는 딱 맞지 않았고, 어딘가 허술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내일부터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등짝을 내보일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브래지어 하는 초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