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준 작가의 <One Step Away> 사진전을 다녀왔다. 뉴욕 맨해튼에서 거주하는 물리치료사인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도시의 풍경을 찍는다고 한다. 삭막한 도시에서의 삶에 눌려 숨이 막힐 듯하다가도, 잠깐 거리로 나와 그가 살고 있는 그 도시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찍는 순간에는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그가 느낀 아이러니가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사진 속 무채색 빌딩에 번지는 노을빛이, 빼곡히 엉겨 붙은 빌딩 틈 옥상에서 즐기는 일광욕이, 똑같은 테라스에 놓인 서로 다른 테이블들이, 그저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러다 문득, 사진 속의 공간은 분명 맨해튼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많이 닮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 익숙한 풍경 속에 내가 차마 보지 못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6월, 이경준 사진전에서
사진전을 둘러보며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딱딱한 기하학의 수직적 패턴들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감각적인 쾌감을 넘어 따뜻한 감상을 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 두 번째는 오랜 시간 내가 가지고 있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사진 몇 장으로 이토록 쉽게 바뀔 수도 있다는 깨달음. 어쩌면 첫 번째의 감상이 나의 뉴욕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근본적인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1~2시간 만에 나는 이경준 작가의 시선으로 뉴욕을 바라보는 경험을 했다. 시각적으로, 혹은 사진으로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것의 힘도 다시금 느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경준 작가가 살고 있는 곳이 뉴욕이라는 점이다. 그가 서울에 살았다면 뉴욕의 마천루보다는 여의도와 을지로 그리고 삼성역의 모습을, 센트럴 파크 대신 서울숲, 올림픽 공원의 색다른 모습을 담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미래와 현재, 관계, 삶의 방향성과 같은 삶 전반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기도 해요. _이경준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핸드폰 사진첩에 들어가 올해 내가 최근 찍은 사진들을 둘러봤다. 사진 속에는 대부분 내가 기뻤거나, 감동받았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놀랐던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특히 내가 심적으로 힘들었던 기간에 찍은 사진들에도 온통 긍정적인 감정들만이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정작 ‘그 기간’에 브런치에 남긴 글들에는 없는 순간들이었다. 브런치에 왜 이 사진들을 올리지 않았을까,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옅어진 감정을 사진을 보며 다시 느꼈다.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감정들. 긍정적인 감정은 '기쁨'이 뿐이다.
감정 언어의 70%는 부정적인 언어라고 한다. 이는 진화심리학적인 이유로 자주 해석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공포심과 같은 감정들은 인간을 방어적으로 행동하게 하여 결국엔 종의 생존을 돕는다.'라는 설명들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로 인간의 부정적 감정은 더 세분화되고, 우리들의 행동 양식의 뿌리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내가 브런치 <월간 회고>에 후회와 자책, 걱정, 자기반성의 글들을 기록한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찍은 사진들은? 그저 그 순간을 남기고 싶고, 누군가와 그 감정을 나누거나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같은 시간 동안 다른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그런 양가적인 감정이 참 묘하게 다가왔다.
필터링된 장면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오늘의 기억에 그날의 감정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진들을 이곳에 기록하고 싶어졌다. 내가 10년, 20년 뒤에 보고 싶은 순간들은 나의 지질한 반성의 문장들이 아니라 어쩌면 이 사진 한 장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와 우리를 위로하는 건 결국 “기쁨”이듯이. 그리고 어쩌면 그 사진 한 장이 과거를 돌아보는 미래의 나에게 더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내가 이경준 작가의 시선에 쉽게 전염되었듯이. 어쩌면.
종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은 무관할 수 있다 _이동진
순간들,
올 상반기 동안 꼭 남기고 싶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몇 장 선별해 봤다.유독 해외 출장이 잦았던 한 해라 해외에서의 기억들이 참 많다. 되도록이면 내가 '힘들다며 투덜댔었던' 기간에 찍은 사진들을 골랐다. 스크롤 압박을 기대하시라.
1월,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업무상 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이 굉장히 잦은데, 그럴 때 우연히 마주하는 이런 멋진 풍경들은 묵혀 있던 스트레스를, 아니 모든 걸 일순간 잊게 만들어준다.
유독 다사 다난했던 올 1월에 만난 이 순간들은 그만큼 더 강렬하게 남아있다. 사고도 나고, 파파라치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휴일은 거의 반납했었지만, 그냥 다 잊고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저희 내년에는 바쁘더라도 꼭 주말 비우고, 여행지에 잠시 다녀오는 게 어때요?"라고 선배에게 말한 나의 바람이 내년엔 부디 이뤄지기를.
2월, 파리 센 강변에서
처음 파리 여행을 떠난 건 5년 전 여름이었다. 그 당시 사하라 사막에서 시작된 이상 기후로 파리의 온도는 45도에 육박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이 어떻게 사는 걸까. 더위에 허덕이며 유일하게 에어컨을 설치한맥도널드, 스타벅스만 찾아다녔었다. 문득 그날의 아쉬움이 떠올라 출장 복귀 때 맞춰 휴가를 쓰고 파리로 향했다.
겨울의 파리는 비 오고, 춥고 우중충하다며 절대 가지 말라던 사람들의 만류에도 일정을 강행한 나에게 파리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나를 말렸던 지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거리는 춥고, 비로 얼룩진 건물들은 을씨년스러웠다. 다만, 예술가들이 가득한 벼룩시장과 울려 퍼지던 음악과 멋진 옷을 입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나는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한 행복을 느꼈다.
(사진은 허락을 받고 촬영했습니다.)
3월, 너의 이름은 뭐니?
구미에 출장을 자주 가곤 하는데, 그곳에 가면 꼭 들리는 중국집이 있다. 보통 중국집이 그러하듯이 호불호 없고, 메뉴는 간단하며, 시키면 금방 나오는, 심지어 맛있는, 직장 동료와 (먹어야 한다면) 먹는 최고의 음식점이다. 맛도 맛이지만, 내가 유독 이곳을좋아하는 것은바로 이 애교 넘치는강아지 때문도 있다.식당 주인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그냥 '똥개'라고 하시는 바람에 나에겐 그저 이름 없는 강아지이지만, 이름 모르는 것치곤그간 정이 많이 들었다.
이 사진을 찍은 날은 유난히 일이 잘 안 풀린 날이었다. 점심 때는 이미 훌쩍 지난 늦은 시간, 전기차 충전 때문에 혼자 밥을 따로 먹었던 날,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을 먹기 위해 도착한 이곳에서 한참 동안 이 똥개와 시간을 보냈다. 보통은 담배 피우며 일 얘기만 하던 이 시골 마당에서, 배도 긁고, 머리도 쓰다듬고, 앉아! 도 해보고...
근데 진짜로 "똥개, 앉아!"라고 하니까 앉더라. 사장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5월, 기린 떡볶이에서
대구 지하철 3호선 범물 역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늦은 시간, 비를 피하기 위해 근처 24시간 무인 카페로 뛰어갔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낯선 가게 입구에서 나는 익숙한 간판을 발견했다. 바로 '기린 떡볶이'였다.
'기린 떡볶이'를 처음 알게 된 건 10살 때, 우리 반 반장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요즘 말로 '인싸'였던 우리 반 반장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깔끔하게 포장된 생일파티 초대장을 돌렸다. 때는 이제 막 개학한 3월 말,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아직까지 반에서 친구를 1명도 사귀지도 못한 나였다. 그런 나에게 생일 파티 초대장이라니! 태어나 처음 받은 생일 파티 초대장에 설레어하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장소는 반장 집. '도대체 얼마나 넓으면 반 아이들을 모두 초대하는 걸까?' 손에는 반장에게 선물로 줄 필통을, 품에는 어쩌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득 안고 도착한 그곳엔, 반장과 친한 10명 남짓한 아이들만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무슨 일로 왔냐'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몇몇은 아마 내 이름도 몰랐을 것이다.
"왜 이제야 왔어!"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반장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팔을 끌어당겨 옆자리에 나를 앉혔다.
"너 이름이 xx이지? 너랑 되게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와줄 줄은 몰랐어." 그가 했던 단 두 마디 말에, 나는 어느새 그 방의일원이 되어 있었다.
하나 둘 선물들이 반장에게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않아 선물과 포장지들이 우리 앞에 놓인 탁자를 가득 채웠다. 한아름 축하를 받은 반장의 어머니는우리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과 떡볶이를 들고 오셨다. 떡볶이가 너무 맛있다는 우리들의 말에 머쓱한 표정으로 '직접 한건 아니고, 집 앞 떡볶이 집에서 포장해온 거야'라고 대답하셨다. 반장이 좋아하는 떡볶이 집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기린 떡볶이>는 나의 10년 인생 최애 맛집이 되었다. 그리고 반장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학원 가는 길에 둘이서 꼭 들려 먹었던 <기린 떡볶이>, 종이컵에 쌓인 밀떡과 삶은 달걀, 그 위에 꽂혀 있는 이쑤시개, 특유의 꾸덕하고 새콤한 소스, 가격은 500원, 지금도 내 인생 최고의 떡볶이. 주인 아주머니는 아직 계시려나?
낯선 가게와 익숙한 간판, 22년이 흘러 다시만난 이곳에서 나는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반장에게 보냈다.
5월, 애리조나에서
해외 출장을 자주 간다는 말을 하면 꼭 돌아오는 말들이 있다.
"회사 돈으로 비행기도 타고, 밥도 먹고, 주말엔 여행도 하고, 너무 부러워." 처음에는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해서 조목조목 단점을 읊기도 했지만, 요즘엔 '사무실 한 곳에서만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부러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장단점이 다 있어요" 정도의 대답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이건 진짜 너무 좋았다!'라는 경험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올해 5월 미국에서 있었던 오프로드 운전교육. 대략 4일간 이어졌던 교육 기간 동안 나와 동료들은 애리조나에 있는 오프로드 트레일들을 돌아다녔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멋진 트레일들을 차로 타보고, 유능한 강사에게 전문 지식도 전수받고, (Jeep도 타보고), 정말 돈 주고도 하기 어려운 경험을 돈을 받고 한 것에 감사함을 많이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3주의 출장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달콤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6월,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사진전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받은 영감으로 6월 내내 썼다 지우기만을 반복했던 '반년 회고기'를 마침내 쓸 수 있었다.
이 사진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진보다 한 줄의 글귀였다. 그 글귀를 적으며 이 긴 회고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