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엄마하나와 남자아이셋의 두번째이야기
어려서부터 새 학기가 시작하고 3월 초 나의 생일이 돌아올 즈음에는 감기, 몸살을 앓았다. 등교를 못 할 정도로 열이 펄펄 끓고 목이 아파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환절기이기도 하고 편도선이 잘 붓는 편이라서 새학기마다 2~3일 정도는 결석했다.
엄마는 하필 목이 아프고 입 맛 없을 때만 맛있는 것들을 해주면서 먹어보라고 권한다. 평소에 그렇게 먹으면 그만 좀 먹으라고 하시면서도 말이다.
성장하면서 면역력이 높아졌는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크게 아파본 일이 없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 없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다방구,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등 통통했어도 운동신경이 꽤 있어서 놀이에 빠지지 않았다.
대학을 와서는 4년 내내 검도부 동아리에서 아침마다 운동을 했다.
급기야 대한검도 공인 2단 자격으로 졸업을 했다.
활동적이고, 젊었고, 걱정, 고민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싱글맘이 되었다.
혼자가 아닌 나를 포함한 네 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엄마이다. 환경은 수시로 변한다.
그래도 활동적이고 아직도 젊고, 걱정, 고민 안 한다.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어서 좋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일 년에 한 번 링거를 맞아야 할 만큼 세게 아프다는 것이다.
처음 아팠을 때가 기억난다.
평소에 워낙 병치레를 안 했던 터라 내 몸의 증상을 내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아팠다.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병원을 가서 열을 재 보니 38도였다.
주사를 맞고 수액을 한 병 맞고 집에 온 것이 시작이었다.
몇 일 있다가 화장실을 가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산부인과를 갔더니 방광염이 심하다며 입원을 권하였다.
당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었다.
또 맘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일을 쉬어 버리면 그달 생활 할 여유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링거 한 병을 맞고 약봉지를 들고 집에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아플 수도 없구나.’
‘책임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무겁고 힘들구나.’
누구랑 의논을 할 수도 없고 부탁을 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들었다.
혼자서도 괜찮은 나였는데 괜찮지 않았다.
세상이 무서워졌다.
행여 아이들이 아프거나 진로를 고민할 때도 법적으로 보호자는 엄마인 나뿐이다.
나의 선택으로 아이들의 인생이 결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의지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짊어진 상황을 같이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옜날에 옛날에 아파서 학교를 못 갔는데 엄마는 시원한 수건으로 내 몸을 계속 닦아주고 아빠는 퇴근길에 초코파이를 사다 주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왜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많이 떠오르는 생각 중에 그 생각도 났다.
목이 따끔거리거나 오한이 들 때면
밥을 많이 해두고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잔뜩 사다 놓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아이들끼리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재빨리 병원에 가서 약을 미리 받아두고 온수매트 온도를 3으로 맞춰놓는다. 그다음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다. 그렇게 주말에 쉬면 몸살감기뿐 아니라 모든 병이 오려다가 되돌아간다.
참! 종합영양제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집안의 가장인 나는 소중하다. 내가 나를 챙기고 아낀다.
여전히 아직 활동적이고 젊고 걱정. 고민은…. 조금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