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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베르만 Jul 05. 2023

고요한 안식처

 너와의 인연은 숨 가쁠 정도로 더웠던 2021년 여름, 어느 전시장에서였다. 매끈한 갈색 피부의 훤칠한 너는 멀리서도 빛이 났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너를 보고 가슴이 떨렸다. 오랜만에 느낀 설렘의 감정이 낯설었다. 북미 쪽에서 왔다는 간단한 소개를 받은 후 네가 걸고 있던, 너의 명함 같던 이름표를 봤다. 이름표에서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져 너를 외면했지만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너는 내 시선을 잡아당겼다. 넓은 전시장에서 난 너를 계속 의식했고, 넌 무심히 나의 시선을 받으며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너와 엇갈리는 시선을 주고받을 때, 네가 내 삶 속에 편입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는 나와의 인연을 이어갔지만 내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네 앞에서, 다른 사람과 오랜 시간 통화를 하거나 식구들과 밥을 먹어도, 주말 오후 내가 지인들과 왁자지껄 술을 마셔도,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어도 넌 침묵으로써 나의 시간을 함께 했다. 나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 주었고 나를 지지해 주었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쓸 때에도 곁에서 고요한 응원을 보내왔고, 생일날 받아온 꽃바구니도 포용해 줄 줄 알았다. 내가 혼술 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내려고 떼쓰거나 나를 소유하려 들지 않았고 나 역시 소유했지만 소유했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너는 직접적인 개입 없이 편안한 방식으로 삶에 스미듯 개입되어 있었고 네가 있어서 내가 중얼거리는 모든 말들이 외롭지 않았다. 넌 전지적 시선으로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내 삶의 청중 같았다.


 네가 스쳐지나 온 시간들이 궁금했으나, 나와 어떠한 사소한 접점도 없던 너의 생애를 깊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적막을 기둥 삼아 깊고 크게 숨 쉬며 완강한 단단함을 완성했으리라. 시간과 공간을 건너온 너의 동그란 흔적을 마주하며, 너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의 무게가 같은 것인지 생각해 본다.


 돛단배를 품어주는 평온한 바다처럼, 넌 언제든 고요한 틈을 내어주며 나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너의 자리가 익숙한 나는 이제 네가 없는 자리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교감했고 서로 소외되지 않았다. 너는 나를 기다리며 너의 자리를 여백으로서 남겨두었고 너의 여백은 또 다른 시공간을 예비하며 오늘도 적막하다.




 2021년 여름 우드슬랩 전시장에서 너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 넌 세라믹이나 대리석처럼 서늘하지 않았고 나의 체온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북미산 월넛’이라는 영롱한 이름 옆에 적힌 가격이 날 주저하게 했지만, 그 주저함 속엔 고요한 인연의 첫 시작을 알리는 설렘이 섞여있었다.


 나와 인연이 된 이후로 너는 가족들이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며 평온한 하루를 감사하는 자리였고, 지인들과의 유쾌한 소통의 자리였으며 조용히 책 읽고 글도 쓰며 사색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전,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에 대한 고민도 너와 함께였다. 다소 멀리 간 표현도 허락해 준다면 너의 자리는 나의 성찰의 공간이었다. 나의 일상과 성장을 함께 하는 너인데 그저 ‘식탁’으로 밖에 부를 수 없음이 미안하다.

 어떠한 인연으로, 이름 부를 수 없고 만질 수 없던 북미의 나이 많은 나무가 나의 젊은 식탁이 되어 내 삶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이 아득한 인연에서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너 역시, 너의 몸에 새겨진 나이테를 개별적이고 고유한 지문으로서 들여다보고 쓰다듬자 무명의 식탁이 아닌 ‘나의 식탁’이자 나만의 ‘꽃’이 된 것 같다.


 나이테에는 세월의 역사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으나, 난 그저 쓰다듬을 뿐 그 오랜 시간과 적막을 감히 읽을 수 없다. 너는 굽이진 나뭇결 사이사이에 적막을 가득 채운 채 오늘도 고요하다. 나이테 앞에서 나의 시간은 가볍게 흐르고, 나는 너의 고요한 자리에서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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