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이 원래 이런건가?
난 사실 그에게 다시 만나자고 제안할 마음을 먹은 것도 승산(?) 가능성이 있다고 봐서였다.
지독히도 겁이 많은 나는 상대방이 Yes 해주지 않을 것 같은 것엔 도전하지 않는데 이 접근을 강행한 이유는
그가 당연히 다시 만나는 것에 동의 할 만큼 우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만 사귀지 않는다 뿐이지 밖에서 누가 보면 당연히 우리는 연인으로 보일만큼 가깝게 지내기도 했기에.
사실 그냥 그렇게 지내도 나한테 불편한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재정립을 원했던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이것도 내 욕심에서 비롯된 거지만, 남자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근데 우리 다시 만나는 거 아니잖아' 라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그러면서 그의 눈치도
보게 됐고. 점점 이러고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서 분위기가 꽤나 좋다고 생각될 무렵 난 얘기를 꺼낸 것이다.
확신을 갖고 만났던 그에게 꽤나 찝찝한 반응을 얻고 나니 불안해졌다. 기본이 다정한 애라 내가
오해했던건가 싶으면서 말하지 말걸 그랬나 하고 후회도 엄청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 기다릴 수 밖에.
그는 3일이 지난 후에도 답을 준다거나 연락같은 게 없어서 난 조금 더 참을까 하다가 내 인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일 없으면 잠깐 만나자고 다시 운을 띄웠다. 그도 흔쾌히 그러자고 하길래
내 걱정은 기우였나 하며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그를 만났지만 날 찾아오는 불안감은 기우가 아니었단 것을
증명했다.
그는 내 예상을 뒤엎고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것도 먼저 말하지 않길래 내가 결국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그에게 다시 물어봤고 그는 망설이는 태도 그러나 명확한 말투와 표정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또 속은 쿵 하고 무너지는 느낌이었고 갑자기 걔가 너무 너무 미워졌다. 집에 돌아와 생각을 하고 해 봐도 걔가 너무 못 됐다고 생각했다. 지가 나 사랑하지 않는 대서 헤어져놓고 1달만에 돌아와 만나자고 해놓을 땐
언제고 만날 동안 조금 싸웠다고 또 안 만난다고 그러더니 이제 내가 만나자고 해도 또 거절하고.
물론 모든 건 내가 선택한 것들이었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나 결과는 내 몫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걔가 정말 야속했다. 그때즈음엔 매니저 언니가 내가 발렌틴이랑 만나는 걸 눈치채서
비록 발렌틴은 밉지만 너의 결정을 내가 뭐라 할 권리는 없으니 잘 해보라고 응원해주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다시 만나는 건 정말 힘든 거라고. 한번 헤어지자고 했던 사람한텐 또 헤어지자고
하는게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라고, 그래서 노력 많이 해야 할 거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계속 내 머리 속에
되풀이 되며 정말 그렇네 싶었다. 이제 난 더 이상 그를 만나지 말아야 했고 아무리 그를 만날 수 없어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이 연을 끊어내야 했다.
그렇게 결심했지만 마음 속 한 켠에는 그를 절대 볼 수 없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단지 자존심 싸움일 뿐, 시간이 지나면 또 뭔가 그가 다시 다가오지 않을 까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 나에겐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듯 하다. 표면적 이유는 거절을 당했고 이제 그에게 연락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 였지만 한 편으로는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으면 다시 그가 손길을 뻗쳐오지 않을 까 하는 이상한
촉이 또 발동했다.
6월은 어느새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었고 6월이 생일인 난 이번 년도는 생일을 되게 쓸쓸하게 보내겠다며
미리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런던의 락다운은 이제 풀릴 기미가 보이고 있었던 차라, 한식당도 오픈
준비를 슬슬 했고 오픈 전 대청소도 하러 나가면서 석사 논문 준비, 발렌틴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와 연락을 안 한지 몇주가 됐을까, 그는 아주 뜬금없이 연락했다. 정말 뜬금없이.
자기가 예전에 너에게 했던 못된 말들 사과하고 싶다면서. 다른 의도 정말 아니고 밥을 한번 사주고 싶다고.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아마 미친놈 아니야 하고 무시했을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그럴게 정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거절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
밀당을 하고 앉아있냐며 빽- 하고 소리 질렀을 수도 있을 만큼의 행동이었지만 난 진짜 솔직히 말해서
반가웠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절대로 그를 기다렸다는 티는 내고 싶지 않았고 걔랑 사귈 때는 해보지도 않던 밀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의 패턴을 파악했듯이 내가 얘한테 관심 없는 듯 연락을 끊으면 얘도 안달이 나는 듯한
패턴이지 않나 해서. 그래서 최대한 쌀쌀하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지만 속으론 내가 한번 이렇게
차갑게 대했다고 바로 발 빼는 거 아니야 하면서 혼자 초조해 했다.
다행히도(?) 그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그냥 정말 미안해서 밥 한끼 사주고 싶다고, 그간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굴고 막 대한거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답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이미 내 맘 속에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예스 였지만 이 예스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못 이기는 척 말해야 하지 하는 고민이었고 스케줄을 보는 척 하다가 오후에 시간이 나는 날로 차이나타운에
있는 우리가 자주 가던 중식당에서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 즈음엔 한식당이 오픈을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를 만나기로 한 날 난 얼른 오전 shift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엄청 설레고 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가짐을 딱 잡고선
그를 만났고 역시나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운 감정이 퐁퐁 하고 솟아올랐다. 엄청 오래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그를 보니 날 확 덮치는 편안함, 안정감. 그에게 느끼는 그 감정들의 농도는 너무 진해서
내가 손 쓸 수가 없다. 우리가 좋은 일 있을 때마다 자주 가던 그 중식당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린 대화를
나눴고 그는 그냥 미안해서 연락했다며 머뭇 거렸다. 난 그의 의도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하는 분위기 자체 안에 지금 있고 싶지가 않아서 얼른 말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연락 왔던 그 시점부터 이미 내 맘은 봄 햇살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았다고.
또, 자존심 상하는 건 내가 그럴 거라는 걸 그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또 한번 행복했던 건 그때의 그의 눈은 예전 날 볼 때의 눈, 그리고 첫 재회 직후 날 바라보던 그의 눈.
그 사랑 그득한 눈이 다시금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진 모르지만
또 다시 날 바라고 있다는 마음이 한껏 깃들어 있는 눈빛이었기 때문에 짐짓 모르는 척 했어도 속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나 그때 참, 외로웠나보다. 누군가 날 사랑해주고 아껴준다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결핍된다는 그 결핍감이
그리도 참을 수 없었나 싶다. 특히 절대 나에게만은 아낌없이 사랑을 줄 것 만 같았던 그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의 공백은 오로지 그의 공백 으로만 채워졌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이제서야 들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고 미련하지만 그땐 최선의 선택이 아닌 유일한 선택지 였다. 다가오는 그를 절대
막지 않는 것.
우린 밥을 맛있게 먹고 우리 집까지 걸었다. Pimlico는 런던의 Central 쪽과 걸어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소화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치를 부릴 수 있었고 우린 여름 냄새 흠씬 풍기는
6월 초 런던의 해질녘 그 순간을 즐기며 부단히 걸었다. 해가 그 어느때보다 느릿느릿 져 가고
따뜻한 오렌지 빛 하늘 아래 걸어가던 그 날의 경로나 공기, 냄새 또한 잊을 수 없다.
우린 입 밖으로 재회 라는 말 따위 내지 않았지만 다시 맞잡은 손에서 서로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서 굳은 결심을 했다. 이번엔 얘한테 많이 바라지 않기로.
정말 이 관계를 위해서 노력해보기로, 이 사람을 한번 정말 존중해주기로.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이런거 저런거 생각하고 따져봐야 하는 거 자체가 반쪽짜리 관계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도 한편으론 씁쓸했으니까. 예전엔 나의 모든 걸 사랑해주던
사람이었는데. 그렇지만 이미 출발점이 달랐던 예전 관계의 수명은 다 했고 우린 새롭게, 정말
새롭게 시작해야했다. 마치 이제 알게 된 사람처럼. 그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몫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고 나도 이젠 다른 '나'로써 그를 대해야겠다고. 더 이상 한낱 어린애들 장난 같은 밀당으로
겨우겨우 우리의 관계가 소생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내고 싶었다,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