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본 지도 몇년이 됐고 어느 새 어른들이 그 때 해주신 말씀이 틀리지 않단 것도 알게 됐다.
수능은 너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렇게 큰 걸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거.
정말 그렇다. 진짜다.
하지만 어떤 것은 본인이 직접 경험한 후에라야 이해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기에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나도 그랬으니까.
첫 수능을 실패하고 부모님을 실망시킨게 미안해 하루 종일 죄인처럼 방 안에 박혀 있을 때 아빠가 그랬다.
이게 지금은 제일 큰 실패 같아보이고, 큰 실패겠지만
살아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날이 올거라고.
충분히 괴로웠던 나에게 아빠의 말은 단 한자도 위로되지 않았다. 죄스러움만 더 가중시켰을 뿐.
어찌보면 당연했다. 고등학교 3학년, 19살짜리의 세계가 커봤자 얼마나 크다고.
19살짜리의 아직은 소박했던 세계 안에선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지 일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만 바라보고 달릴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 또한 그때의 특권이지만.)
시간의 흐름은 외적인 세계를 확대시켰고 수능 실패로 겪었던 맘 고생보다 더 한 맘 고생도 많이 겪어봤다.
그래서 이제 꽤 자신있게 수능으로 너의 세계가 뒤집히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수능’이라는 개념이 각인 시켜버린 그 날들의 존재감이란 엄청난 것이어서
아직도 ‘수능’날엔 나도 괜시리 떨리고, 또 안쓰럽다.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수능이 주는 압박감의 무게가 아직은 충분히 버거울 나이의 그들이라는 걸.
그래서 안쓰럽고. 그렇지만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듯 담담하게 나름의 응원을 건네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담담함과 담백함으로 응원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니까,
이 정도의 압박감만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압박감이 절대 담담할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일부러 이 쪽에서 먼저 담담한 척 하는 것이지만 서도.
인터넷에서 고창이었던가, 수능 날 한 학생이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도착하지 않아 고창 군수님을 포함한 사람들이 발을 동동거리다 허겁지겁 도착한 학생에게 응원의 선물을 쥐여주며 뛰어가는 학생의 뒷 모습을 끝까지 응원한 영상을 봤는데 왜 이리 가슴이 찡하던지.
이처럼 수능 때가 다가오면 모든 매체에서 수험생들을 응원하고 보통 이런 호들갑을 좋아하지 않지만서도 적어도 수능은 예외다. 아니, 예외가 뭐야 볼때마다 눈물짓는다.
이런 응원은 호들갑을 떠는 응원이든 조용한 응원이든, 아무렴 좋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들의 고생을 순수하게 알아주고 응원해주는 것 같아서.
짧은 단어나 문장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그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응원이 마음을 매번 울린다.
그래서 일면식 없는 학생이 갑자기 다가와 눈물을 툭 터뜨려도 아무 말 안하고 안아줄 수 있는 시기가
수능이다. 모두가 한번쯤 그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것도.
얼마나 힘들었을꼬-의 마음 아닐까?
적어도 지금 저 순간만큼의 압박감이 얼마나 고될까라는 마음에
아이들의 긴장이 서려있는 몸과 눈이 가여운 것.
요즘처럼 냉담한 시선과 몸짓이 만연한 이 때, 수능의 풍경만큼은
다시 한번 이 세상에 짧은 온풍 한 번 부는 것만 같다.
모두가 이렇게 순정을 담아 수능을 본, 그리고 또 언젠가 볼 학생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했으니까 괜찮다고. 결국 시간이 지나야 깨닫겠지만,
수능? 그거 진짜 별거 아니다! 그러니, 혹시나 이걸 읽고 있는 누군가 중, 힘들더라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고 이미 수능 날부터 응원을 모두가 하고 있었으니까!
진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