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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by 장원희

엄마는 종종 단어를 잘못 말했다.

주로 요즘 새롭게 등장한 낱말들에 해당했는데 이를테면 유행하는 캐릭터인 ‘농담곰’을 ‘장난곰’으로 부르는 느낌이다. 어느 유명한 아빠와의 대화내용처럼 ‘필라테스’를 ‘텔라피스’로 말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나는 늘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아들었음에도 꼭, 그걸 고쳐주었다. 엄마 그게 아니야, 엄마 이거라니까, 하면서 말이다. 같은 단어가 두세 번쯤 반복해서 잘못 불리면 짜증도 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단어를 잘못 말하는 걸 창피해했다. 어떤 플랫폼의 이름이라던가, 요즘 방영하는 드라마의 제목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실수했을 때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도 내 실수를 깨닫거나, 상대가 내 말을 바로 고쳐주면 아 맞네요, 하며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 뒤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쩔 땐 얼굴이 붉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만큼 신경 쓰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바꿔주어도, 여러 번 틀린 단어에 답답해하며 고쳐주어도,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대화를 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래, 정말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언어란 본디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수단이었다. 수많은 과거의 대화에서 비록 단어 하나가 엇나갔다한들 그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었다. 우리는 겉모습이 그 뜻과 어긋난 낱말에도 제대로 소통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흐름을 끊은 것은 나였다.

그것을 깨닫자 내가 참 바보같이 느껴졌다. 수많은 세월 동안 주변의 단어를 고쳐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좋아하던 만화를 주제로 친구와 얘기할 때가 있었다. 그 만화를 잘 모르던 친구는 인물의 이름을 잘못 말했다. 아주 사소한 실수였기에 누구를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 만화를 보라고 이야기하던 상황이었음에도, 중요한 장면을 설명하고 있던 부분이었음에도, 굳이 그걸 고쳐주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친구는 그 말로 흐름이 끊기고 흥미를 좀 잃은 듯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친구를 위한답시고 고쳐주었다. 잘못 알고 있으면 안 되니까.


나도 얼마나 많은 잘못된 단어를 뱉었던가. 엄마와 대화할 때도, 앞서의 친구와 대화할 때도, 스스로 깨달아 정정한 적이 꽤 된다. 그 모든 때에 엄마와 친구는 한 번도 내 말을 고쳐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난 잘못 알았던가? 혹여나 이름 하나쯤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던가? 그런 것은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안 고쳐주면 계속 잘못 알까 봐. 저 사람이 또 실수해서 어리석어 보일까 봐. 일상에서의 사소한 단어들을 두고 한 이 생각들은 정말 그들을 위한 거였을까, 돌이켜보면 아니었다. 단지 내가 불편했을 뿐이다. 고쳐주고 싶고, 그렇게 바꿔주었음에도 또 틀리는 상대를 질책하고 싶고, 결국 상대를 위한 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참지 못해 하는 어리석은 말이었다.


우리 엄마는 왼쪽, 오른쪽을 밥 먹듯이 헷갈린다. 오히려 너무 제대로 이야기하면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아 불안하다. 이전에는 이것도 꼭 고쳐주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짜증도 냈다. 엄마는 또 헷갈리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농담곰’, 왼쪽과 오른쪽 따위가 아닌 엄마에게 중요한 것들은, 엄마는 헷갈리지 않았다. 나는 무지하고 오만하여 자꾸만 그런 엄마를, 그리고 주변을 내 멋대로 바꾸려 했다.


어제도 엄마가 오른쪽을 왼쪽이라 말했다. 종종 가는 음식점의 이름도 잘못 말했다. 이 음식점의 이름은 10년째 잘못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난 무려 5년을 지독하게 고쳐주었다. 그 정도면 정말 엄마에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내 욕심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이제는 말하지 않는다. 요즘도 종종 다시 보는 만화 <아따맘마>의 "엄마의 어휘" 에피소드에서 나온 장면처럼 ‘핫 소스’를 ‘겨자’라 하든, ‘미디엄’을 ‘밀레니엄’이라 하든, 그렇구나, 한다. 언어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니까. 언어의 생김새가 아닌 그 안의 맥락과 마음으로 나눈 대화를 더 이상 나의 욕심으로 끊지 않는다.


나 역시도 더 이상 단어를 잘못 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끔 노래 제목이라던가, 유행하는 것들의 이름을 실수하면 조금 창피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부끄러워지려다가도 “요즘 이름들은 왜 이리 어려워~” 하고 넉살 좋게 웃고 나면 정말 아무렇지 않아 진다.

진짜 중요한 건 말 너머의 맥락과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제야 겨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고치던 사람에서, 단어를 고치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더 잘 듣게 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말이 맞는지보다 그 마음이 어떤지를 먼저 듣는다. 어쩌면 조금 틀린 말들이 오히려 그 사람의 말투와 기척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장난곰’을 들으며, 그 안에 담긴 웃음을 듣고, ‘왼쪽’이 ‘오른쪽’이라 해도 그 익숙한 몸짓을 안다.


이제는 그 말의 결을 듣는다. 말 너머의 마음을 듣는다. 고치지 않아도, 나는 이제, 잘 들을 수 있다.

그건 참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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