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나는 서운할수록 다정하고, 불쾌할수록 웃으며, 어색할수록 살가워진다.
늘 그래왔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불편한 분위기를 견뎌내야 할 상황들이 내겐 무엇보다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느 날 약속 당일 사정이 생겨 못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연락을 하며 친구의 반응을 걱정했다. 사실 제일 두려웠던 건, 혹시라도 불쾌함을 내게 바로 토로하여 그 갈등을 타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느니 그냥 내게 서운함이 쌓여버린 친구가 말없이, 조용히 나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 정도로 나는 조금의 갈등이라도 겪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서운함을 느끼고 빈도도 꽤 잦다. 불과 며칠 전에도 한 친구의 언행에 어이가 없고 서운했다. 다만,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드러날까, 그래서 불편한 기류가 생길까 봐 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덕담과 함께 피곤할 텐데 먹으라고 가방에 있는 초콜릿을 급히 꺼내준 건 덤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오래전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 불편한 상황에는 먼저 호탕하게 화내고 따졌으며 상대가 받아들이면 시원하게 용서했고, 그렇게 뒤끝 없이 끝냈다. 이제는 지겹다. 정신이 지친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어떤 인간관계에 쓸 심력이 없는 듯했다. 지금은 아주 조금의 불쾌함과 서운함에도 그 사람을 다신 안 보는 상상을 한다. 앞에서는 괜찮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조금씩, 그대로 끝내는 상상. 내 마음을 아주 조금 불편하게 한 죄로 어떤 이유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나와의 연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한가. 이것이야말로 요즘 말하는 회피형이다.
사실 나는, 갈등이 심하게 드러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잘 못 본다. 활자로 되어있으면 무엇이든 잘 보는 편인데, 이상하게 영상은 그랬다. 마지막으로 챙겨본 드라마가 12년 전 방영한 <기황후> 일 정도니 말 다했다. 오해와 오해가 쌓이고 억울함과 분노가 쌓이는 전개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상 작품은 <캐치! 티니핑>(이하 ‘티니핑’)이다. 모든 시리즈를 다 보았다. 티니핑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 틈만 나면 언제 다음 시리즈가 나오냐고 족히 10번은 물었다. 티니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회차당 11분 정도로 짧아 사건이 길게 가지 않으며, 그곳엔 모든 아동물의 클리셰가 있다. 완전한 악역은 없고 결국 모두를 용서한다. 오해가 생겨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반드시 푼다. 그 사랑과 우정, 화해와 용서 속에서 나는 점점 이상적이지 못한 갈등을 겪을 용기를 잃어간다. 나부터가 티니핑의 ‘하츄핑’ 혹은 ‘로미’처럼 성인군자가 아니다. 아무리 얄미워도 온정을 가진 등장인물들과 현실의 인물도 많이 다르다. 우리의 갈등은 그들과는 다른 양상일 수밖에는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갈등을 겪을 용기가 나지 않는 상대라면, 그냥 그 정도 관계인 거라고. 나는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질수록, 지쳐갈수록,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인 걸까. 그렇지만 나는 가끔 큰 소리를 내며 친구와 싸우던 그때가 그립다. 싸운 후 어색하게 마주하다가 건넨 초콜릿 하나에 야, 미안, 하면서 풀던 그때가 그립다.
사실, 내 오랜 친구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10년을 넘게 사귄 친구 중 둘에게 다양한 이유로 서운함과 불편함이 쌓여 이대로 정리해버리고 싶은 감각 말이다. 문제는, 한 번도 그들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 한 적 없다. 나는 언제나 털털한 친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아, 뭐 그런 걸 신경 쓰냐, 네가 신경 쓰는 게 나는 신경 쓰인다, 같은 마음에도 없는 말만을 뱉었다. 그러고 정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나도 잊히지 않았다. 풀었다면 달랐을 거라는 마음이 든다.
얼마 전 sns에서 친한 지인이 날 언팔로우 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다. 보는 순간 많은 고민이 들었다. 꽤 친했으며, 그 친구한테는 아닐 수 있지만 정말 잘못한 게 없었다. 그렇게 1시간가량을 고민하다가, 그냥 연락해 보기로 했다. 내가 하루를 고민하든 백날을 고민하든 친구의 마음을 듣지 않는 이상 나는 알 수 없었다. 연락해 보니 화들짝 놀라며 실수라고 친구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실수인 거 같아서 연락한 거라고, 내가 진짜 네가 날 정리한 것 같았으면 연락했겠냐고, 또 평소처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써 말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불현듯 깨달았다. 이게 바로 용기였구나. 염려했던 불편함은 없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겁을 냈을까. 우리 관계는 다시 편안해졌으며, 나는 쓸모없는 걱정으로 마음을 태울 일이 없어졌다. 또, 전혀 쌓이지 않았다.
그래, 티니핑 속 세상처럼 모든 갈등이 아름답게 풀리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관계를 내 마음속에서 혼자 지우기 전에 한 번쯤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걸로 다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내 마음은 더 오래가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