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는 시골에 살았다. 기억에는 시골이지만 현재는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서 전혀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30년 전에는 소똥냄새가 나고 구멍가게 하나밖에 없던 곳이었다. 나는 대여섯살 살았던 그때의 그곳이 아직도 영화의 장면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벽돌로 단순히 지은 방 두칸짜리 집 옆에는 개울이 흘렀다. 길가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는 봄마다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그 언덕 끝에 구멍가게에서 동전 몇개 내고 뭘 사먹다가 돌아오는 길에 넘어서 무릎에서 피가 흐르던 기억이 난다. 네살짜리 아이는 혼자서 그렇게 동네방네 혼자 돌아다녔다. 수풀에는 거미줄이 가끔 보였고 개구리가 많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간 뒤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우리집은 이사를 했고 내가 스무살때 독일로 나온 집에서 벌써 부모님은 두번이나 이사를 하셨다. 독일에서 나는 수도없이 짐을 싸고 풀어야 했다. 수트케이스 하나로 와서 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니 짐은 끝도없이 불어나 있었다. 75 제곱미터의 집에서 나름대로 간단하게 살았는데 이민을 한다고 또 팔고, 버리고, 나누어주었다. 그래도 많은 물건을 제값 받고 파는 법도 터득했고 아이 용품도 그래도 또 임신할 생각이라 중요한 물건은 전부 쌌다. 아끼고 아끼던 덴마크 디자인의 식탁 의자들도 모두 들고 오기로 했다. 팔기도 버리기도 아까운 메트리스도 들고왔다. 아쉽지만 아끼던 화분들은 친한 친구들에게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민을 하기위해 짐을 싸는건 총 삼개월 정도 걸렸다. 7월달에 시작해 페인트칠을 두번 하고 버리고, 싸고, 또 팔고 그러고 나니 우리 짐은 총 10 큐빅미터 안에 전부 들어갔다. 처음 견적을 받을때 이삿짐 회사에서 6천 유로를 달라고 했다. 발품 팔아 비용을 1200유로로 내렸다. 얼마나 정확히 계산을 했는지 그 이상도 이하도 나오지 않았다. 박스안에 파묻혀 몇주를 살았는지. 짐을 빼는 날을 정하고, 열쇠를 주는 날을 정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3일간 이웃 친구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짐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가지 않으면 보증금에서 가차없이 빼버린다. 못자국 하나도 남기면 안된다. 짐을 토요일에 전부 빼고 일요일 아침 밥도 안먹고 집으로 와서 하염없이 청소를 했다. 미친듯이 타일을 하나씩 닦았다. 찬장의 모든 구석구석, 못질 구멍을 매꾸고, 페인트를 칠하고, 해가 질때까지 청소를 하고 녹초가 되었는데 신세 지기로 한 친구 가족에게 설사병이 돌았다. 남편과 나는 그이야기를 듣고 10분정도 한마디도 없었다. 이틀 뒤에 노르웨이로 가야하는데 우리 짐이 도착할텐데, 지금 아플수는 없다. 아기도 아프면 안된다. 아는 사람이 자기 처녀때 쓰던 집을 비워놓는다는 이야기가 번뜩 떠오른다. 그 친구는 흔쾌히 지내라고 했다. 우리는 원래 있기로 한 친구에게 얼굴보고 말도 못하고 짐을 싸서 밤에 그집으로 향했다. 바샤우어 스트라세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방 한칸짜리에 아주 오래된 아파트 빌딩, 삐걱거리는 계단과 화장실에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듯한 곳. 창문 앞에서는 시끄러운 우반(지상, 지하철)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아파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니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스무살 젊었을 적 그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런 것이 낭만일 때도 있었다.
그다음날 아무런 문제없이 집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그다음날 노르웨이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나나 남편이나 베르겐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로 우리는 이제 한살이 된 아기를 데리고 이민을 가고 있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난 곳은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얼반 비반테스 병원이다. 브루탈리즘의 것으로 보이는외관과 수많은 중독자가 매일같이 실려오는 이곳은 아름다운 카날(kanal) 앞에 도심 한가운데에 있지만 아주 과격한 곳이기도 하다. 아기가 태어나고 병원에 있는동안 남편은 건물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인화해 아기 앨범에 넣어두었다. 너는 이러한 곳에서 태어났단다. 지금 자라는 곳은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가 있지만 이런 곳에서 우리는 살았었단다 하는 마음으로.
한국여권과 노르웨이 여권을 가지고 태어난 나의 아이는 나와는 사뭇 다른 인생을 살 것이다. 내가 그리워 하는 음식맛을 영영 모를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던 작가의 책을 한국어로 읽을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서 그 정체성에 나의 이야기를 끼워넣고자 하지만 역시 내가 아이의 정체성을 만들수는 없다. 아이가 앞으로 느끼고 배우는 것은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미지의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 도시 생활을 했지만 옛날 시골에 살던 그 기억이 아이가 태어난 후를 제외하면 내 인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기에 그러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비슷한 장소를 제공해주고자 여기까지 왔다. 산과 바다가 주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위해, 내 아이가 깨끗한 공기과 물을 마시고 차와 소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뛰어놀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해. 다행인 것은 남편도 시골에서 자라 비슷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자라면 언젠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고 싶어할까. 자기가 태어난 곳을 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살았던 베를린도 다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나 내 아이는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아이가 아빠 등에 업혀 산을 오르고 산에서 찾은 블루베리를 입이 파래지도록 먹고 산딸기를 찾아먹고 모닥불을 피우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이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