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을 마치며
2010년 3월 5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나는 스무살이었다. 도시에서는 아직도 석탄 타는 냄새가 났고 긴 겨울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거리는 사람들을 볼수가 없어서 아주 고요했다. 이제는 그 느낌과 냄새만 간간히 기억이 나고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싼 음식을 찾아야 했던 것, 멀리 한국에서 방문 온 친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마음에 걸렸던 것,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던 것 등이 생각난다.
막무가내로 도망치듯 왔던 독일. 그때는 그랬다. 방 한칸 빌리는데 180유로를 줬다. 주소지를 등록할 수 없는 방이었다. 그마저도 몇개월 되지 않아 쫓겨났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고생했다. 겨울이 너무 추웠고 베를린의 아파트는 냉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위로할 수 있던건 그런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방황을 했다. 어떠한 기약도 없이 왔기때문에. 어떤 일을 하고싶은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아무것도 몰랐다. 밤에 바에서 일을 하고 낮까지 잠을 자고 독일어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기 일쑤였다. 그래도 3년정도 지나자, 영어도 편해지도 독일어도 어느정도 할수 있었다. 너무나 육체적인 노동으로 힘들었고 아파도 쉴수가 없었다. 하루 살이가 그런 뜻일 것이다. 젊은것이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었다.
그때는 가난해도 괜찮았다. 모두가 그랬고 서로 나누어 줬다. 예술가나 음악가가 많은 도시기에 그런 낮은 생활 수준에도 자유를 누리고 자립을 할수 있다는게 베를린의 매력이었다. 그런 시기는 이제 지나가고 나도, 베를린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변했다. 많은 스타트업 기업이 들어오면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육체 노동을 벗어나 제대로된 직업을 얻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어떻게 비자를 얻고 살아남았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돈도 학벌도 없다. 이런 일련의 시간을 겪으면서 배운 것은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이다.
기댈곳 없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외롭다. 나는 일터에 매일 아침 30분 일찍 도착했다. 정상적인 월급을 받고 정상적인 건강보험을 가지고 제대로된 침대와 따듯한 방이 있는 것은 내가 누릴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매달 일정량을 저금하고 목돈을 만들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 삼년 안에 월급을 두배로 돌렸다. 내 나이 서른쯤이었다.
독일에서 10년 정도 살고 사회생활을 몇년 하다보니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결혼도 했는데 이제는 아이를 생각할 때였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경험은 아마 한국이었다면 꿈도 못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내 헌신에 보답하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아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돈 걱정 하지않고 내가 누릴수 있는 것들을 누리며 소소한 행복을 누렸다.
독일에서 13년을 살았지만 나와 노르웨이에서 온 남편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지만 그중 독일인은 손에 꼽었다. 나는 아마도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릴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고 돌아가기에는 갈 곳이 없다. 내 정체성은 너무나 한국인이지만 또 그것만이라고 하기에는 부수적인 것들이 붙어서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었다. 아이가 있으니 이제 앞으로 올 수십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베를린은 더이상 싼 도시가 아니었고, 가족을 꾸리려고 하니 조금 더 넓은 집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다보니 나나 남편이나 그리 있는 집 자식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해내야 한다. 월세가 비싼 유럽에서 월세로 몇천유로 내는 것은 어쩔수 없으니 그래서 집을 사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느정도 자산이 필요한데 아무리 우리가 가진 자산을 계산해보고 견적을 내어봐도 우리가 살만한 집은 더이상 베를린에 없었다. 베를린은 큰 도시라 외곽으로 나가면 굉장히 멀어진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도 독일은 최근 경제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해 우리가 여기서 어떠한 미래를 꾸릴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다시 한번 결정을 내렸다. 독일을 떠나기로. 남편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으로 자식을 키우기로. 나에게는 너무나 두려운 결정이었다. 독일에 와서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은 정말 너무 길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6개월에 걸쳐 고민했다. 아이가 어린 지금이 최적인 것 같았다. 지금 유치원을 보내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면 또 그대로 일상에 묻힐 것 같았다.
나는 노르웨이에 살 수 있을까? 유럽과 다르게 또 다른 먼 나라인 느낌이다. 우리는 주사위를 던졌다. 다른 유럽 친구들은 안되면 돌아오라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독일 영주권은 다른 나라에 가면 소멸한다. 나는 또 다시, 이민을 한다.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그래도 이제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이 있다. 그래서, 이민을 한다. 가본 적 없는 도시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