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산(3)
“내 마음이 커피나 커피 하우스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우정이요. 커피는 구실에 불과할 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었던’ 카페 ‘키바한(Kiva Han)’의 한쪽 벽에 쓰여진 글이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 커피를 마시는 공간에 대한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정의다.
‘있었던’이라는 과거 시제를 사용한 건 이 카페, 1475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카페여서다. 세워진 장소도 지금의 명칭, 튀르키예 이스탄불이 아닌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그런데 이 글 예사롭지 않다. 커피와 커피하우스(또는 카페)에 대한 이유와 생각이 500년을 훌쩍 넘긴 현재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커피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유형의 공간인 커피하우스(또는 카페)를 조성했다. 그리고 그 공간은 기능적 역할을 넘어 인문과 예술, 정치와 경제를 논하는 장소가 됐다. 지금도.
오스만 제국에서 커피의 위상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남편이 매일 정해진 양의 커피를 제공하지 못하면 아내는 ‘이혼’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1475년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카페 ‘키바한’은 커피를 뜻하는 키바(Kiva)와 집을 의미하는 한(Han)의 합성어다. 이름 그대로 커피하우스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엔 600여개의 커피 하우스가 운영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커피하우스 형태는 그림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몰타 출신 아마데오 프레지오시 백작이 1854년 그린 수채그림 ‘터키의 커피하우스, 콘스탄티노플(A Turkish Coffee-House, Constantinople)’.
그림에선 호화로운 19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눈길을 끈다. 그림을 소장한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뮤지엄(V&A Museum)은 골든 혼 해안에 있던 커피하우스로 추정하고 있다.
튀르키예식 추출법인 제즈베로 만든 커피를 따르는 모습과 금속 커피컵도 보인다. 중앙의 분수는 커피하우스 내부를 꾸미는 미학적 요소인 동시에 온도를 낮춰주는 기능적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 커피하우스가 단순히 커피만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그림은 보여준다. 왼쪽에는 음악가 그룹, 밴드가 보이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각자의 문화를 향유한다. 긴 산수유 파이프를 가진 그리스인, 물 파이프를 들고 있는 아프리카 젊은이도 있다. 페르시아 상인도 보인다.
당시 오스만제국에선 커피하우스가 연극 등 예술 공연이 열리고 예술과 문학 정치를 논하는 장소가 되면서 ‘현자들의 학교’라 불렸다.
이후 커피는 오스만 제국 인근 중동의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갔다.
16세기 들어서는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히자즈의 수도이자 이슬람권 성지라 불리는 메카는 물론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 중동의 대도시 등에서도 커피하우스가 속속 문을 열었다.
형태는 콘스탄티노플의 형태와 유사해 모두 대화하기 좋게 사각형 형태로 소파와 쿠션을 비치했다.
유럽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커피하우스가 가장 먼저 생겼다.
1645년 산마르코 광장에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인데 콘스탄티노플의 키바한처럼 사람들이 아늑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역할을 했다.
밀라노 출신 화가인 주페세 베르티니가 1892년 그린 유화 ‘화가 프란체스코 과르디, 플로리안 카페에서 그림을 판매하다(Der Maler Francesco Guardi verkauft seine Bilder vor dem Café Florian)’는 카페 플로리안이 카페 이상의 역할을 했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림의 배경은 산마르코 대성당과 높이 98.6m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종탑이다.
배경 앞 산마르코 광장엔 카페 플로리안의 야외 테이블이 놓여 있다. 빈자리 없이 가득 채운 테이블들엔 남성은 물론 여성과 터번 등 중동 복장을 한 외국인들이 빈자리없이 가득 메운 채 커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베네치아 화가 과르디는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로 다가가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며 판매하고 있다. 테이블로 모여든 사람들이 그림을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꽤 진지해 보인다.
카페에서 일어난 일들은 공간과 규모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그림 속 카페 플로리안에서 사람들이 예술을 얘기하고 미술작품을 거래하던 건 실제가 됐다. 지금도 2년마다 열리는 미술 전시 ‘베니스 비엔날레’가 처음 열린 장소가 바로 카페 플로리안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으로 커피 시장이 확장되면서 커피하우스도 곳곳에 세워지고 철학과 정치 예술을 논하는 장소가 됐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이전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할 공간은 선술집(펍) 뿐이었다. 문제는 과도한 음주로 발생하는 다툼과 갈등이었다. 커피하우스는 이런 문제를 단박에 해소했다. 커피는 각성작용이 있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토론하는데 적합했다.
켈리 인틸(오레곤대)은 자신의 논문 ‘유럽 커피 하우스 : 정치사’에서 “펍과 커피하우스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커피하우스는 세상을 벗어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곳이 아니라 시사 문제를 토론하고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곳이었다”며 “이전엔 사람들이 이런 토론을 할 수 있는 포럼이 없었다”고 커피하우스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커피하우스가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신조어도 생겨났다.
영국에선 1페니만 있으면 누구나 커피하우스에 입장해 정치와 사회적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평등과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고 ‘페니 대학(Penny Universities)’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죽치고 앉아 비현실적인 정치적 견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커피하우스 정치인’이라 일컫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귀족 샤를 루이 폰폴리츠 남작은 1728년 방문한 런던에서 본 커피하우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가는 게 영국인에게는 일종의 규칙이었는데, 그들에게 (커피하우스는) 비즈니스와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신문을 읽으며 종종 서로를 바라보는 곳이었다.”
○ 정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유럽과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게 됐고 구체제에 대한 합리적인 반발과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됐다.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볼테르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모여 절대왕권으로 상징되는 구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소가 됐다. 귀족을 위한 폐쇄적인 살롱 문화와 달리 누구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부르주아 계급은 커피하우스에서 민중들을 만나 치열하게 토론하며 개혁의식을 키워갔다. 절대왕정의 몰락을 가져오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 셈이다.
특히 1686년 문을 연 프랑스 최초의 커피하우스 ‘르 프로코프(Le Procope)’는 볼테르가 즐겨 찾던 곳이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커피값 대신 자신의 모자를 두고 간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영업 중인 이 커피하우스에 가면 나폴레옹이 두고 간 그 모자를 볼 수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상인들의커피하우스(Merchant's Coffee House)’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폴 리비어와 존 애덤스 등 당대 저명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필라델피아역사학회는 홈페이지에 이곳이 커피하우스가 되기 전엔 선술집이었다고 설명한다. 1773년 델라웨어 강 근처에 시티선술집(City Tavern)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독립 전쟁 이전 집회소로 사용됐다. 1774년 여름 제1차 대륙회의가 열린 곳도 시티선술집이었다. 이후 1785년엔 상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물건을 거래할 수 있도록 공간 일부를 커피하우스로 바꿔 ‘상인들의커피하우스’라 불렀다.
커피하우스가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생겼다.
1675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 폐쇄를 알리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식민지의 미래나 정부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 논의하면서 군주제의 실패나 함정에 주목했을 거라 봤기 때문이다.
저항은 강력했다. 런던은 물론 영국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찰스 2세는 결국 선포를 철회했다.
앞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4세는 불만이 많은 사람들과 군인들이 비밀스레 모여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며 1633년 커피하우스를 모두 폐쇄하고 커피 유통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커피하우스는 이후 40년도 넘은 1675년에야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커피하우스 문화에 반발하는 청원을 내기도 했다. 런던 퀸메리대 교수이자 작가인 마크넘 앨리스는 저서인 ‘커피하우스 문화(Coffee house Culture)’에서 1700년대 영국 런던을 방문한 앙리 미송의 책 ‘영국 여행에서의 회고록과 관찰’ 속 내용을 인용해 이 선언문을 소개한다.
1674년 발표된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청원(옆 사진)’에서 여성들은 “커피는 남자들을 빈둥거리게 만들고 돈을 허투루 쓰게 할 뿐 아니라 정력까지 감퇴시킨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던 커피하우스의 남녀 차별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경제 그리고 과학
커피하우스는 지적 교류의 장소인 동시에 거래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유명보험사인 ‘로이드(Lloyd)’의 탄생이다. 당시 런던의 증권거래소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함께 모여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장소였다. 상인인 에드워드 로이드는 1688년 타워 스트릿에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만들었다. 이곳에 상인과 선원, 해운업계 사람들이 모이자 로이드 리스트를 발간해 제공했다. 세계적 보험사인 로이드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도 로이드처럼 뉴욕의 ‘톤틴 커피하우스(Tontine Coffee House)’가 뉴욕 증권거래소의 출발점이 됐다. 필라델피아에선 시티선술집에서 시작된 상인들의커피하우스는 규모가 커지면서 공간을 분리해 필라델피아상인거래소로 확장되기도 했다.
세계적 경매회사인 소더비와 크리스티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됐다.
영국 과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모임 '왕립학회'도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왕립학회 초기 회원인 아이작 뉴턴,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 등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토론한 내용은 근대과학의 토대가 된다.
○문화
19, 20세기 무렵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문화의 산실이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됐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에서 1880년대에 영업을 시작한 두 카페,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와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알베르 카뮈, 파블로 피카소, 시몬느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과 작가, 미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두 커피하우스에서 일어난 일들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 ‘로리타’를 쓰기도 했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라 본 프랑케트(La Bonne Franquette)’도 있다.
라 본 프랑케트는 홈페이지에 “보헤미안 분위기와 적당한 임대료를 내는 작업장에 매료돼 정착했다”며 많은 예술가들이 몽마르트에 모인 이유를 설명했다.
15세에 이미 스페인 천재 화가로 소문이 자자했던 파블로 피카소는 물론 무명의 화가들은 몽마르트에 있는 라 본 프랑케트를 찾아 돈 대신 그림을 주고 식사를 했다. 무명의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이 빈센트 반 고흐였다.
라 본 프랑케트 홈페이지는 “여관과 카페를 방문해 그림 소묘 판화 조간 또는 시를 음식과 교환했다. 피사로 드가 세잔느 르누아르 고갱 로트렉 그리고 반 고흐”라고 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고흐의 ‘카페 테라스(La Guinguette)’는 바로 라 본 프랑케트의 테라스를 모델로 했다.
그림의 제목은 카페테라스지만, 이 그림을 소장한 오르세 미술관은 ‘몽마르트의 카페테라스(La Guinguette à Montmartre)’라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밤의 카페테라스’와의 혼동을 막기 위한 박물관 측 배려가 아닐까.
놀랍고도 부러운 점은 앞서 언급한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라 본 프랑케트 모두 파리에서 여전히 영업하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미국에서도 커피하우스는 문화의 공간이 됐다. 1960년대 기존의 가치관에 대항하는 히피 문화가 확산됐을 당시 포크가수들은 커피하우스에서 노래했다.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밥딜런이나 포크의 여왕 조안 바에즈 등도 처음에는 커피하우스에서 기타 한 대만 들고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커피하우스 문화와 역사가 전 세계 커피하우스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어디서건, 언제건 커피라는 대전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커피하우스는 정치와 경제 허브가 되고 문화와 예술의 플랫폼이 됐음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한국의 첫 번째 커피하우스는 1902년 완공된 손탁 호텔에서 시작됐다.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에 머물 당시 외부에서 음식을 가져와 이를 조달한 독일 국적의 프랑스인 앙투아네트 손탁에게 정동의 땅과 한 옥 한 채를 하사했다. 그 곳에 지은 게 객실 30개 규모의 근대식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의 1층 레스토랑은 외국 인사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구미 외교관과 개화파 지식인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면서 ‘정동구락부(정동클럽)’라 불렸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 ‘정동구락부’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아닌 조선 외교의 상징이 됐고 항일 운동의 불씨를 당기는 역할을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커피하우스도 문을 연다. 1909년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에 ‘조선 땅 최초의 다방’으로 기록되는 ‘남대문깃사톈’이다. 일본인이 독점해 오던 커피하우스 영업은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인에게도 허용됐다.
조선인들은 카페 대신 다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카페는 커피만 파는 게 아니라 여성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팔며 춤도 추게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가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시민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게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인이 경영하는 첫 카페, 아니 다방은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이경손이 1927년 개업한 ‘카카듀’다. 당시 조선일보 만평가이자 영화인인 안석영은 '은막(銀幕) 천일야화’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인 카카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국동 네거리를 나가려면 못 미처 이 길에 처음 생긴 양옥집(옛날 이성용씨 병원 밋층)에 ‘카카듀’라는 찻집(茶房)이 생겻스니, 이것이 서울의 원조요 찻집의 야릇한 풍속의 시초다.”(1940년 2월 14일자)
이경손은 하와이 출신 미스 현이라는 닉네임의 여성과 카카듀를 운영했다. 이국적인 실내 장식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름, 각종 전람회와 문학 좌담회 장사로 쓰이며 많은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생소한 이름 카카듀. 프랑스 혁명 때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이는 비밀 아지트인 술집 이름에서 가져왔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도 등장하지만, 지금은 카카듀가 세워진 장소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카카듀가 생긴 이후 많은 예술인들이 카페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천재시인 이상이 1933년부터 종로에서 운영한 ‘제비다방’이다. 운영은 당시 이상의 연인이던 기생 금홍이 맡았다. 제비다방의 공간은 시인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이상이 직접 구성했다. 도로와 접한 면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지금의 카페처럼 안과 밖이 보이는 구조로 만들었고 내부의 벽면은 모두 흰색으로 디자인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다. 유학파 지식인과 기자는 물론 당대 모던보이, 모던걸이 몰려들었다. 소설가 김유정과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던 화가 구본웅 등이 제비다방의 단골이었다.
1935년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제비다방은 이상의 집이 있던 터에 재연됐다. 더불어 “청진동 어딘가에 있었다”고만 알려져 왔던 제비다방의 위치도 확인됐다.
문화평론가 박광민씨는 ‘미술 세계’ 2016년 11월호에 발표한 논문 ‘구본웅과 이상, 그리고 목이 긴 여인 초상’에서 “시인 이상이 1933~35년 2년 동안 운영했던 제비다방의 위치는 ‘서울 종로구 종로1가 33-1’이며, 현재 주상 복합 건물 그랑서울이 들어서 있다”고 밝혔다.
해방 이후엔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전투식량의 한 종류인 C-레이션(MCI)을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유통되기도 했다. 비스킷 콩 햄 등의 식품과 커피로 구성된 전투식량은 한국전쟁 때 더 많이 들어오면서 부산 국제 시장, 서울 남대문시장 등을 통해 유통되기도 했다.
한국의 커피하우스 중 대표적인 정치와 문화, 철학의 공간은 ‘학림다방(學林茶房)’이다. 1956년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너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7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면서 지난 2013년엔 서울시가 미래유산에 등재하기도 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부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되면서 세대를 넘어 모두가 찾는 장소가 됐지만, 학림다방은 이전부터 오래된 다방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 정치와 예술 인문을 공유하던 커피하우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곳이었다.
소설가 황석영 이청준, 시인 천상병 김지하 등 기라성 같은 문인과 가수 전인권, 연출가이자 작곡가인 김민기 등이 단골일 정도로 문화계 인사들의 아지트였다. 한국 영화계 대표 배우인 송강호 설경구 황정민 등도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할 때 학림다방을 자주 찾았다.
얽힌 이야기도 많다. 김지하 시인이 필명을 ‘지하(之夏)’에서 지금의 ‘지하(芝河)’로 바꾼 곳도 학림다방이고 천상병 시인이 지인에게 술값을 빌리기 위해 찾은 곳도 학림다방이었다.
뿐만 아니다. 독재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의 역사를 써 내려가던 때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학림다방의 방명록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각계 인사 800여명의 글이 담겨 있다.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학림사건’의 이름도 이 다방 이름에서 가져왔다. 당시 경찰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력)’이 첫 모임을 학림다방에서 가졌다는 이유로 전민학련 관계자를 불법 감금해 수사하고 고문했다.
세월과 함께 이야기를 품은 학림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을 담고 있다. 수십된 년 낡은 소파와 테이블은 손때를 타고 세월을 타서 색이 바래고 벗겨졌다.
계산대 뒤 편으로 빼곡히 들어찬 클래식 LP판 1500여장과 음반사한테 얻은 클래식 연주자 사진들도 액자에 담겨 공간을 채운다.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다방 입구에 서울미래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황동일의 헌시, 마지막 구절이다.
1970년대 대중화된 커피하우스는 디스크자키(DJ)가 있는 음악다방이었다. 라이브 공연도 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음악도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대중화된 것이다.
1976년엔 획기적인 발명품도 나왔다. 한국이 세계최초로 발명한 상품은 바로 동서식품이 개발한 믹스커피 ‘맥심’이다. 한 봉지 안에 커피와 설탕 프림이 황금비율로 담겨 있어 인기를 끌면서 인스턴트커피 시대를 열었고 맥심이라는 브랜드는 믹스커피의 대명사가 됐다. 1977년 등장한 커피 자판기도 놓칠 수 없다. 주로 대학에 보급된 커피 자판기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 동전 몇 개만 넣고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1990년대 활성화된 커피전문점도 시대상을 반영했다. 무선호출기인 삐삐가 대중화되면서 편안한 소파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파르페나 비엔나커피가 인기 메뉴였다.
한국의 커피와 커피하우스 문화에 대변화가 일어난 건 놀랍게도 글로벌 커피 브랜드의 역할이 컸다. 1999년 이화여대 앞에 첫 매장을 연 스타벅스다. 커피와 함께 문화를 판매한다는 이미지와 함께 인기를 끌었고 어색하던 테이크 아웃 문화를 보편화시키기도 했다.
스타벅스의 등장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고급 커피 전문점 전성시대가 열렸다. 스타벅스에 이어 커피빈 등 글로벌 브랜드가 자리 잡았고 엔젤리너스 할리스 투썸플레이스 파스쿠찌와 카페베네 등 국내 업체도 경쟁력을 키웠다.
커피 시장이 커지면서 저가 브랜드도 출사표를 던졌다. 이디야커피는 2001년 중앙대 1호점을 시작해 커피 시장에서 영역을 확장했다. 이후 빽다방, 메가커피, 컴포즈커피, 더벤티, 매머드커피 등이 뒤를 따르며 저가 커피 시장을 키웠다.
최근 한국의 커피 시장은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다. 곡물 술 과일 등을 추가한 베리에이션 커피, 원두의 종류와 추출 방식의 다양화로 종류는 다양해졌고 세분화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커피향이 나는 카페는 지식과 예술의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당시의 모습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커피와 커피하우스 역사와 그 흐름엔 부산도 있었다.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