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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쇼생크 탈출>의 19년

<행복의 철학> 2주차. 2025. 9. 12.

by 김태라

내일 <행복의 철학> 본격 첫 수업이 있다. (지난주 오티를 빼면) 7월 21일 이후 50여 일간 강의를 쉬고 다시 강단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9월 12일 수업에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다루는데, 이를 위한 글을 구상하던 중 ‘동굴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발생했다.


동굴 밖의 빛을 본 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빛(진리)을 전하는 문제. 이에 대해 나는 지난 학기 <삶과 철학>(영웅의 여정) 강의에서, 그것이 영웅의 ‘귀환’이며 깨달음의 ‘구현’이라 말한 바 있는데 그 ‘구현’의 구체적인 내용이 떠올랐다. 떠올랐다기보다는 나의 경험을 정리하다 보니 의미가 드러났다.


나는 대학생 시절 ‘동굴의 비유’ 발제문을 쓰다 의식이 깨어난 일이 있는데(2006년)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현재, 그 깨어남(覺)의 체화가 이루어졌고, 이를 영적 탄생 후 성인(成人)이 되는 과정이라 적은 바 있다. 영적(실질적)으로 올해 만 19세가 되는 것이다(나의 동안童顏과 초건강한 몸이 이와 연관이 있는 듯싶기도 하다). 2006년부터 2025년까지 ‘19년’은 깨어난 의식이 육·체화되는 데 걸린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도출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실상의 빛을 본 자가 환영의 세계로 돌아가 진리를 전하는 행동의 의미는, ‘타인’에게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선각자가 자기 ‘몸’에 깨달음을 체화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는 지난 학기까지 통찰된 ‘깨달음의 구현(귀환)’에 관한 완성된 자각이라 할 수 있다.

동굴의비유.png

머리로 깨달은 것을 온몸에 체화하여 전 존재가 빛의 화육으로 변용(transfiguration)되는 과정이 바로 ‘동굴(어둠) 세계에 진리(빛)를 전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머리(의식)로는 깨달았으나 몸(무의식)은 여전히 어둠에 갇혀 있기에 ‘동굴 속 죄수’인 몸을 개화시켜야 하는 것이다(이를 위한 수행 중 하나가 <프라나 프로젝트>였다).


불교에서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하듯, 빛의 각(覺=봄)은 단박에 이루어지지만 그 빛을 전 존재에 체화하고 육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무의식적 습기와 프로그래밍을 닦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그 탈-습(習) 및 존재 전이에 19년이 걸린 것인데, 이를 ‘몸이 동굴을 탈피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19년 동안 동굴을 깨고 탈출하는 이야기가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무엇인가? 바로 그 유명한 <쇼생크 탈출>이다.


영화 속에서 ‘죄수’ 신분인 앤디는 돌망치 하나로 19년간 굴을 파서 동굴(감옥)을 탈출한다. 플라톤에서도 동굴에 갇힌 자를 ‘죄수’라 말하고 있으니 또 하나의 연관성이 생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앤디는 누명을 썼고 실제로 죄가 없다. 죄 없는 죄수라는 것. 갇혀 있을 자가 아니라는 것. 원래 빛의 세계에 있다 내려온 존재라는 것. 그의 탈출의 동력은 여기서 나온다. 본래의 자리(존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록한 단상이 있어 옮겨 본다.


<쇼생크 탈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떨어진 자가 감옥의 구조를 이용해 죽음의 자궁을 탈피하는 이야기. 단순한 탈옥 영화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지구에 떨어진 영혼과 인생의 목적에 대한 은유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자유다. 앤디는 소장에게 '당했기' 때문에 자유를 얻었다. 소장을 위해 일한 몫까지 챙겨 나왔다. 그 모든 것이 실은 상위 차원에서 계획된 일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머무는 이유는 하나, 탈출을 통해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일종의 게임이다. 인생은 방탈출 게임과 본질상 다를 것이 없다.

본 연재북은 강의 교재로, 원래 이런 글을 구상한 것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흘러갔다. 결론적으로, 인생 자체가 동굴 탈출 과정이며, 그 탈출은 일종의 게임이고, 그 게임의 목적은 자유 획득이라는 것이다. 동굴 속 어둠은 부자유, 동굴 밖의 빛은 자유를 상징한다. <쇼생크 탈출>이 보여주듯, 동굴 탈출이 가져다주는 행복의 본질은 자유다.


그렇다면 각자(覺者, 빛을 본 자)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이 동굴에 갇혀 있음을 아는(깨달은) 자이다. 반대로, 동굴 속 죄수는 본인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매트릭스’ 속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아가 없어 언제든 요원이 그 몸에 빙의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동굴(어둠)에 갇힌 그림자적 존재가 상징하는 바다.


불교에서는 그 무명(無明)의 동굴에 ‘윤회’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반복되는 어둠의 루프를 끊는 것이 진리 획득(체화)이며 이를 득해야 자유와 행복을 얻는다. 자유 없이는 행복도 없다. 그래서 ‘매트릭스’(동굴) 안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불가능한 것인데, 다음 주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매트릭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또 보자.


<행복의 철학> 오늘의 논제

탁윤: 인간이 철학을 함으로써 행복에 이른다면 끊임없이 철학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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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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