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철학> 3주차. 2025. 9. 19.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을 인간 삶의 궁극 목적이자 최고선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행복을 단순한 쾌락이나 일시적 만족이 아닌, 인간 고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의 원의에 따를 때, 아리스토텔레스 행복관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비유하면) ‘동굴’ 속 사상에 불과하며, 나아가 자체적 모순을 지닌 허상으로 전락한다.
행복으로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eu(좋은)’과 ‘daimon(신적 존재성)’의 합성어인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레테(arete)’ 개념과 결합하면, 행복이란 존재의 본성(신성)을 탁월하게 실현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 본성이 (사회적) ‘기능’으로 발현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근본적으로 ‘존재성’과 ‘기능성’은 전혀 다른 개념임을 ‘관조의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지 못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행복의 완성(아레테 실현)을 위해 갖가지 ‘외적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내적 탁월성 외에도 재물, 명예, 가족(가문), 외모, 인간관계, 심지어 행운과 같은 요소들이 행복에 필수적 조건이 된다. 이러한 입장은 ‘현실적’이라고 평가되지만 내가 보기엔 이보다 ‘비현실적’인 행복관이 없다. 외적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현실’은 동굴의 비유에서의 ‘동굴’을 뜻한다. 바로 <매트릭스>이다. 이 ‘가상현실’에서는 인간이 자기(Self)로 존재하지 않기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다. 외적 조건은 결핍으로 구성된 자아(ego)에게만 문제가 된다. 외적 의존성이 바로 에고의 본성이다. 그런데 외적 조건에 존재가 종속된 상태는 근본적(실질적)으로 비존재와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어리석은 자는 외적 조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동요되어 영혼의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 이에 반해 현자는 영혼이 거의 흔들리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언제나 영혼의 참된 만족을 누린다.”(스피노자, 『에티카』 중)
위의 “영혼의 참된 만족”이 바로 행복(지복)이며 에우다이모니아이다. 그리고 참된 행복은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 따라서 외적 조건에 따라 존재가 오락가락하는 행복(존재성)은 ‘에우다이모니아’의 원의를 자체적으로 파괴하는 모순이자 허구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를 에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잘 기능하는 에고성’을 ‘아레테(탁월성)’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Self)의 실현은 단순한 재능이나 사회적 기능의 차원을 넘어선다. 진정한 자기실현은 천명(天命)에 따른 일, 즉 대우주와의 합일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 과정에 외적 조건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저절로 생긴다. 그것이 없다면 그 ‘없음’ 상태가 천명 실현의 완벽한 조건이 된다. 에고적·사회적 시선으로 봤을 때나 외적 조건의 유무가 문제되는 것이지, 천명실현자에겐 물질/명예/관계 따위의 것들이 있든 없든 전부 있는 것과 같다. “대자연은 영웅의 임무를 지지하기에”(조셉 캠벨) 필요한 것은 언제나 주어지고, 주어지지 않는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의 소유 여부와 무관하게 자기(Self) 상태의 존재, 즉 에우다이모니아의 존재성에는 결핍이 없다. 존재의 근원은 영원한 충족이기 때문이다. 신은 결핍을 모른다. 결핍은 에고의 환상이다. 인간 존재를 결핍과 불완전의 관점에서 바라봤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R. 에스포지토가 말했듯 “공동체의 본질이 결핍”인 것과 연관되며, 인간의 결핍성, 즉 외부 의존성의 정도가 바로 부자유 및 불행의 정도가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인간을 ‘매트릭스(동굴)’의 어둠에 묶어두는 노예적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 본래적 탁월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환경이 빈곤하거나 여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전제에 근거하며, 그 결과 인간 존재를 충만한 본성(생명 에너지)으로부터 차단하여 헛것(그림자)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불교의 ‘무욕(無欲)’이나 도가의 ‘무위(無爲)’ 개념에 비추면 아리스토텔레스 행복관의 허구성이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동양사상의 입장들은 외적 조건을 단절하거나 초월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사유한다. 불교에서는 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며, 무욕 상태에서 진정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도가에서는 자연스러운 무위의 흐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외적 조건의 부재는 결핍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충만’이 된다. 이와 연계되는 스토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한 대표적인 입장인데, 다음 주에는 스토아 철학을 통해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되는 자족적 행복관을 살펴볼 것이다.
<오늘의 논제>
박민지: 이미 안정된 곳에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것이 원래 자기가 원하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때, 계속 안정된 곳에서의 아레테를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재능을 살려서 내적인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