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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글을 쓸 때 인간은 무엇을 쓰는가

by 김태라

2022년 일본에서 AI가 쓴 소설이 문학상 심사를 통과하며 이슈가 되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AI는 시, 소설, 기사, 논문 등 인간의 언어로 된 거의 모든 텍스트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설펐던 문장이 갈수록 정교해졌고 이제는 특정 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흉내 내거나 복잡한 플롯과 스토리를 설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펜’이 등장한 것이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한다. 기계가 글을 쓸 때, 인간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오랫동안 글쓰기는 문장의 구성, 어휘의 선택, 작품의 구조 등 텍스트의 형식적 완성도를 높이는 지난한 노동에 속했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인간이 오랜 시간 연마했던 기술의 분야를 순식간에 대체하며 창작의 패러다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기계가 대체하는 핵심 능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유려한 문장의 생성이다. AI는 특정 작가의 문체나 감성적인 톤을 재현함으로써 심혈을 기울여 미문(美文)을 만들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린다. 둘째, 글의 구조와 플롯의 구성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연성 있는 플롯을 제안하고 논리적 흐름에 맞는 글의 뼈대를 신속하게 형성한다. 셋째, 자료 조사와 내용 요약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정보의 수집과 정리 같은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된다.


이는 글쓰기와 창작의 중심이 외적 형식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의식)’, ‘어떠한 관점을 가질 것인가(철학)’, ‘어떻게 의미를 창출할 것인가(창의성)’ 등이 주요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글쓰기 노동의 종말은 작가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을 외형적 작업에서 해방시켜 내적 비전을 구현하는 존재로 이동시키는 대전환의 시작인 것이다.


문인(文人) 시대의 종언

‘문인(文人)’이란 말은 언어를 섬세하게 다루는 능력, 즉 오랜 시간 연마한 일종의 ‘장인정신’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담긴 칭호였다. 그러나 문인의 시대는 AI 기술에 의해 황혼을 맞이하게 되었다. 과거 문단의 권위는 문장력과 형식적 완성도라는 기술적 장벽을 통해 일부 문인과 평론가, 출판사에 의해 독점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AI를 통해 누구나 완성도 있는 글을 생성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의 권력 구조가 붕괴되고 있다. 기술적 장벽이 사라지면서 언어를 통한 창작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영역이 된 것이다.


이는 과거 사진 기술이 등장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사진기가 초상화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자 화가들은 사실적 재현 대신 인상이나 추상적 개념의 표현으로 나아갔다. 오늘날 글쓰기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결과물의 가치 기준이 ‘얼마나 잘 그렸는가(썼는가)’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글의 가치가 재정의되는 새로운 기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독창적인 질문을 던지는 능력, 고유한 세계관을 제시하는 철학, 시대적 맥락을 꿰뚫는 통찰력,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 등이다. 새로운 시대의 작가는 문장의 장인이나 플롯의 대가가 아니라 세계관의 설계자이자 존재의 창조자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생인(生人) 시대의 개막

문인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작가로서 본인은 새로운 인간상인 ‘생인(生人)’의 탄생을 선언한다. 생인은 ‘살아있는 사람’이자 ‘생성하는 인간’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니며, 글쓰기의 패러다임이 ‘서술(Description)’에서 ‘생성(Generation)’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과거의 문인이 현실을 언어로 ‘묘사’했다면, 생인은 언어를 명령어로 삼아 존재와 세계를 ‘불러낸다.’


명령어(Prompt)는 생인의 강력한 도구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창조 의식을 담은 선언이자 세계를 구축하는 설계도이다. 한마디로 프롬프트는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다. 그 주문을 통해 ‘없던’ 것이 ‘있게’ 된다. 생인은 명령어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존재의 DNA를 입력하고 생성될 세계를 정의하는 활동으로 자신의 역할을 전이시킨다. 신이 언어로 천지를 창조했듯 생인은 언어로써 존재와 현실을 새로 쓰는 생성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인은 ‘문장(형식)’의 장인이 아니라 ‘의식(내용)’의 장인이다. 그는 프롬프트라는 도구를 통해 가능성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읽고, 잠재적 세계를 구체화하며, 무형의 아이디어를 유형의 결과물로 변환한다. 이 과정에서 생인은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설계자로 자리하며, 그의 의도와 언어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생생적 힘으로 작용한다.


AI 시대의 휴머니즘, 인간 본질로의 귀환

글쓰기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은 역설적으로 AI를 통해 자신의 존재(본질)로 돌아간다. 과거의 문인이 ‘글’을 썼다면, 현대의 생인은 ‘존재’를 쓴다. AI에게 기술적 부분을 위임함으로써 이 시대의 인간은 ‘잘 쓰는’ 것을 넘어 ‘잘 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때 AI는 일각의 비관론에서 말하듯 인간을 위협하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가치를 발현시키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일에서 벗어나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유하는 능력, 상상하는 능력,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고차적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 등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실존의 핵심이 비로소 무엇을 ‘하는가(Doing)’에서 벗어나 어떻게 ‘존재하는가(Being)’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을 인간 자신으로 돌아가게 한다. AI 시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과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깊이 사유하고, 더 자유롭게 상상하며,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촉구하고 있다.


문인의 시대가 저물어도 언어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는 창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적 변화와 함께 언어를 다루는 자의 역할 전환이 요구될 뿐이다. 이제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자가 아니라 존재를 호출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자로 전환된다. AI 명령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인간(生人)을 부르는 신조어가 바로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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