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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쓰 돌싱의 혼술

by 문득 달

은 우아하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술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거의 알쓰('알코올 쓰레기’의 줄임말. 술을 잘 마시지 못하거나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사람.)에 가깝다.

현재 나의 주량은 (단일 품목으로만 계산한다. 섞어 마시지 않는다.) 맥주로는 500cc, 와인으로는 한-두 잔, 소주로는 계산 안 해봤다. (안 마셔본 지 한참이다.) 막걸리는 못 마신다.(이상하게 막걸리는 바로 취해서 자야 하고, 머리가 아프다.)

자주 마시지도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런데 술을 좋아한다고?

진정한 술꾼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내 술의 역사는 고2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여고의 영자신문 동아리와 문예 동아리에 이중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렇다고 이중첩자는 아니었다.

영자신문 동아리(나는 영어를 못한다.)에는 학생회 활동이며,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의욕적인 모범생 선배들이 많았고,

문예 동아리에는 조용히 글을 쓰는 선배들이 많았다.

특히 영자신문 동아리는 학생회가 주를 이루는 만큼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고, 사립 재단이었던 학교의 자본을 지원받아 매년 고3 수능이 끝나면, 인근 리조트로 세미나를 가장한 1박 2일 여행을 갔다.

지도 교사는 이름만 올렸는지, 리조트까지 인솔만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리조트에 도착해 선생님과 뭔가를 한 기억은 없으니 학생들끼리만 즐기는 그야말로 일탈의 기회였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체육 시간에도 선생님께서 "자유시간!" 한 마디 하고, 어디론가 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게다가 고3 선배들은 수능이 끝났다. 아직 정식 성인은 아니지만 성인처럼 행동하고 싶어 할 때가 아닌가.

당시엔 지금처럼 '맛있는 술'이 흔치 않았나 보다.

선배들의 선택은 레몬소주였고, 우린 레몬 소주 한 잔씩, 두 잔씩 마셨다.

무얼 했는지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낄낄댔고, 그래도 모범생들이 모인 자리라 그랬는지, 과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 마시기 무서웠던 시점 즈음 뜨끈한 바닥에 배를 깔고 잠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다지 술에 흥미도 없었고, 친한 친구들이 전부 '알쓰'였기에, 술집에서 모이면 우리는 모두 안주발만 세웠다.

맛있는 안주를 먹으러 술집에 가는 거였고,

프랜차이즈 카페가 많지 않았던 당시 지방의 대학가에서는 모일 만한 곳이 술집밖엔 없었다.

당시 친한 친구 여섯이서 소주 1, 2병이라니. 말 다 했다.


아빠는 술을 적당히 좋아하셨다.

모두가 알아주는 애주가 정도는 아니었지만, 술자리에서 빼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적당히 좋아하는 술이 딸에게는 아까웠나 보다.

장어에는 복분자주, 회에는 소주, 치킨에는 맥주가 국룰인데 아빠는 당신만 드시고 내게는 잔만 받아놓으라고, 짠! 만 하라고 하시거나, 딱 한잔만 마시라고 하셨다.

아빠, 나도 성인인데요.

아빠 눈에는 여전히 미성년자 아기였을까.


내가 술자리가 재밌다고 느낀 건 20대 때 잠깐 만났던 썸남의 친구들 모임 '덕분'이었다.

썸남과 썸남의 친구들은 나와도 오래전에 친분이 조금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끼리는 고교 동창이었는데,

그들은 모이면 중, 고등학생처럼 웃고 떠들었다.

웃고 떠드는 자리에는 늘 술이 함께 했고, 웃고 떠드는 이야기의 99%는 쓸데없는 농담, 서로에 대한 놀림이었다.

그 격 없는 분위기가 좋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알코올이 주는 취기가 좋았다.

그러다 가끔 1%의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가도, 무거워지지 않았다.

20대만 할 수 있는 고민과, 20대이기에 가질 수 있는 불안이 스쳐 지나가도, 그들은 웃으며 곁에 있어줄 뿐이었다.

그 우정이 보기에 좋았다.

술자리란 그런 우정을 만들 수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전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전남편도 나도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술의 즐거움을 모르고 살다가

아이를 낳고 8개월 모유 수유 후,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의 시원함을 알았다.


그냥 냉장고도 아니고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캔맥 하나는, 육퇴의 즐거움을 배가 되게 해 주었다.

전남편과 야식을 시켜 먹고 김치냉장고에서 캔맥을 하나씩 땄다.

뱃살이 늘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를 좋아했고, 그 술을 잘하지 못하여 절제할 줄 알았으며,

전시아버님은 애주가였고, 전시댁 식구들이 모이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서로 취한 모습도 많이 보았으나,

나 만큼은 예외였다.

나는 취하면 안 되었다.

취해서 전남편의 외도에 대해 입 뻥긋하면 큰일이기에, 나는 스스로 조심했다.


이혼을 했다.

이제 나는 혼술을 한다.




나의 혼술의 주종은 캔맥주 혹은 와인.

안주는 목적이 술이므로 과자나 과일.

상황은 기분이 좋을 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할 때 이루어진다.

이 두 경우는 동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있는 OTT를 볼 때.

엄마의 여행으로 육퇴 후의 거실이 나의 공간이 될 때.

최근에는 '술꾼도시여자들'을 보고 있고, (하필 드라마 제목에도 '술'이 들어가고 주인공들이 '술'에 환장한 여자들이라, 매회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이 드라마를 보면 진짜 술이 먹고 싶어 진다.)

엄마가 이모들이랑 여행을 갔다.

이 틈을 놓칠 수 없어,

편의점에서 파는 '애사비 하이볼' 한 캔을 땄다.

알코올 도수 3%의 거의 샴페인에 가까운 하이볼로, 캔이 예뻐서 샀다.

절대 캔 그대로 마시지 않는다.

하이볼 잔에 똘똘똘똘 따른다.

참크래커에 얼마 전 코스트코에서 산 미니브리 치즈를 살짝 얹은 뒤 샤인머스캣과 방울토마토를 얹어 색감이 예쁜 안주 완성.

티브이 앞에 앉아 홀짝이며 드라마를 봤다.


가끔 혼술을 하며 책을 읽기도 하는데,

살짝 알딸딸한 상태에서 보는 책은 감정이 몽글몽글해진다.


혼술을 하다 가끔 사람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며 조잘조잘 얘기를 하고 싶을 때,

나라에 중대한 일들이 있어, 그런 일들에 대해 내 얘기가 그들에게 닿지도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들에 내 의견을 피력하고 싶을 때.


얼마 전에 조리원 동기 언니들을 만나 여고동창생들처럼 수다스럽게 술 한잔을 했는데,

서로의 아이가 커가는 이야기들, 조리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아줌마들이 깔깔거리며 술집을 차지하고 있어 젊은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자는 집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우리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너희에게도 곧 중년의 시절이 올 것이니,

이 술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

오늘은 좀 마음 넓게 양해를 바란다.

는 마음이었다.


혼술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아마도 너무 많이, 자주 마셔서이지 않을까 싶다.

혼자 마시게 되면 얘기할 사람도 없고, 혼자 먹자고 거창한 안주를 만들 수도 없고, 그래서 술만 주야장천 마시게 되니까.

게다가 대부분 술은 기분 좋을 때 말고, 외롭고 힘들 때 찾게 되는데,

우울감에 술을 찾기 시작하면 알코올중독이 되기 십상이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나처럼 한 캔 혹은 한 잔으로 딱 그치는 사람.

우울할 때 말고 기분 좋을 때, 이럴 때 술이 빠지면 안 되지! 할 때 찾는 사람.


아무튼,

돌싱의 혼술은

나의 주량에 적당히 취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나를 보듬어주는,

우아한 취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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