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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가족이 된 반려견

아이들이 초등 저학년이던 시절, 집안은 늘 정신이 없었다. 아내는 육아와 집안일에 지쳐 있었고, 나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하루를 버텼다. 여유가 없다 보니 작은 말에도 금방 다툼이 났고, 그 시절은 서로에게 남아 있지 않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가방을 멘 채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펫숍에 갔다.

여러 종류의 강아지가 있었고, 우리를 따라 걸으며 하나씩 살펴보다가 하얀 포메라니안과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다가오며 눈을 맞추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울타리를 만들고 작은 집을 마련해 준 뒤 출근했다.
저녁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벤과 놀고 있었고, 아내도 오랜만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그날 이후 집안의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다.


삶의 변화는 늘 거창하게 오지 않고 이런 작은 존재로부터 시작될 때도 있다.


벤과 산책하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다. 귀찮던 일이었지만 걷다 보면 마음이 고르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강아지와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불필요한 생각들을 내려놓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 단순함이 그 시절의 나에게 필요했다.


아이들은 자라 중고생이 되었고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예전처럼 달려 나와 반겨주는 일은 없다.
각자 방에서 자기 시간을 보내고 나는 조용히 불을 켠다. 그런데 벤은 여전히 현관 앞에 있다.
작은 몸으로 나를 둘러 돌며 반기고 발을 톡 건드린다. 사람이 주지 않는 환대를 벤이 무심하게 건네주곤 한다.


벤은 털을 깎는 것을 싫어한다. 털을 깎고 나면 며칠 동안 누워 지내고 밥도 사람이 없을 때 몰래 먹는다.
엉덩이 털이 짧아져 생식기가 드러나는 것이 이 아이에게는 큰 불편함이었나 보다. 우리가 그쪽을 보려고 하면 그대로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강아지도 자기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가끔 샤워 후 나체로 벤 앞에 서 있으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벤이 고개를 돌리며 피한다. 그 모습이 단순히 웃긴 장면이면서도 존재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생각하게 했다.


벤을 보면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 조용히 떠오른다. 벤은 그 시기 집으로 들어왔고, 그 공기와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벤을 볼 때 그때의 감정이 아주 옅게 겹쳐 보인다. 기억은 뜻밖의 순간에 올라오곤 한다.


벤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나와 비슷한 시기다.
이 아이가 몇 년 뒤에는 내 곁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후회할 것들이 떠오른다.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한 것, 더 자주 안아주지 못한 것, 좋은 곳에 데려가지 못한 것.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후회는 부모님을 떠나보낼 때도 똑같았다.
조금 더 잘해드릴 걸, 더 마음을 써드릴걸.

하지만 우리는 늘 뒤늦게 깨닫는다. 인간은 애초에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언제나 망각하고 반복한다.
나는 이제 그걸 인정한다.

후회 없는 삶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후회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해준 것도, 못해준 것도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다. 그때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과거는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삶을 구성한 한 조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요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단 5분이라도 살아 있다는 감각이 또렷한 순간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잠깐의 충만함이면 된다.
그 짧은 순간이 모여 삶 전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오늘은 햇빛이 약하지만 벤과 함께 걸어볼 생각이다.
지나가는 바람 하나, 벤이 앞서 걷는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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