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 등대 Aug 17. 2024

2장 파편 속의 기억 1

승우는 일부러 물이 덜 찬 곳을 향해 성큼성큼 뒷산을 내려왔다. 승우의 목표는 분명했고, 시간을 낭비할 여유따윈 없었다. 민혁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승우는 학교를  오가며 자주 들르던 슈퍼를 향했다. 그 곳은 뽀글 머리를 하고 연신 부채질을 해대던 동네 아줌마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 앞에 서자, 슈퍼라는 파란 간판이 촌스럽게 매달려 있었고, 유리창에는 ‘얼음 있음’ 이라는  문구가 투박하게 적혀있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아무도 없어. 닫은 것 같아.”


민혁이 한 손으로 문고리를 덜컹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하려는 순간, 승우가 돌을 들어 슈퍼의 유리창을 향해 내던졌다. 유리는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고, 그 조각들이 바닥에 힘없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투박한 문구가 적힌 유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가장자리에는 땅 속에서 솓아오른 보석마냥 유리가 군데군데 갈려 있었다. 민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물을 구해야 해."


승우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부서진 유리창을 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이미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고, 민혁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민혁은 승우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뒤를 살폈다.


어두컴컴한 슈퍼 안으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멀리서 샤아- 하고 들렸다. 승우는 선반에 걸려있던 가방을 들고 뚜벅뚜벅 냉장고로 걸어가더니, 생수병을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차분하고도 빠르게, 라이터, 성냥, 빵, 등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민혁은 멍하니 입을 살짝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승우가 자신의 젖은 옷을 벗어 던졌다. 학생답지 않게 잘 단련된 근육이 물에 젖어 매끈했다.


“너도 갈아입어. 젖은 옷 그대로 있으면 체온이 떨어질 거야."


슈퍼에서 파는 흰색 티셔츠를 구겨입은 승우는 민혁에게도 마른 옷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민혁은 고개를 저으며 "됐어"라고 대답했다. 그의 손은 하늘색 하복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민혁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


어느 여름날, 교실은 고요했고, 더위에 지친 매미 소리만 크게 울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제자리에서 바쁜 듯 행동했지만, 교실 뒤편에 앉은 민혁은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날씨와 맞지 않게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 셔츠는 교실 바닥이라도 닦아낸 것처럼 눈에 띄게 허름했다. 민혁은 그저 타조처럼 팔 안으로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교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민혁의 옆자리에 가방을 털썩, 내려놓았다. 그 소리와 함께 민혁의 꽉 굳어있는 듯 했던 어깨도 살짝 내려갔다. 곧이어, 누군가 민혁의 등을 톡톡, 두드리더니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야, 잠깐 밖으로 나와봐.”


한쪽 눈썹을 치켜뜬 민혁이 고개를 들자, 승우가 교실의 뒷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민혁은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슬그머니 의자를 빼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승우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 부모의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뭐야? 왜 불러?”


“이거 받아.”


승우는 민혁에게 쇼핑백을 건네며 간결하게 말했다. 얼떨떠름한 표정을 한 민혁이 쇼핑백을 보았다. 그 안에는 하늘색 반팔 셔츠가 들어 있었다.


“눈대중으로 맞춘거야. 안 맞으면 바꿔야 돼."


승우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민혁은 당황한 듯 승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왜 주는 거야? 어차피 이제 곧 추워져. 하복 같은거 없어도 돼.”


”이제 8월인데? 신경 쓰지 마. 그냥 입어.“


“……”


민혁은 난처한 얼굴로 쇼핑백과 승우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몇 주 전, 승우가 지나가는 말투로 이 더운 날 왜 하복을 입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민혁은 걔들이 소매에 담배 구멍을 뚫어놔서, 라고 대답했었다. 승우는 그 때 딸기맛 츄파춥스를 먹고 있었고, 그 달콤한 사탕을 볼 안에서 몇 번 굴리다가 그렇구나, 한 마디 했었다. 그래서 민혁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날, 집에 간 민혁은 말 없이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쇼핑백 안에서 아직 공장 재봉틀 냄새가 남아있는 하늘색 반팔 소매 셔츠를 꺼냈다. 그리고는 손 안에 흔들리는 옷을 몇 초간 유심히 바라보다 슬쩍 옷을 걸쳤다. 단추를 채우며 거울을 바라보던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딱 맞네…”


—-


민혁은 슈퍼 안에서 젖은 교복을 만지작거리며 그 기억을 되새겼다. 승우는 민혁이 여전히 그 교복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의아해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우는 시선을 돌리며 다시 가방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지금은 그 이상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이거라도 해,"


승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비와 장화를 건넸다.


준비를 마친 승우와 민혁은 깨진 유리 사이로 슈퍼를 나왔다. 사방은 좀 전보다 더 어두컴컴해보였고, 정전 난 마을은 을씨년스러웠다. 승우와 민혁은 입을 굳게 닫은 채, 차오른 물살을 헤치며 전진했다.


###


정숙과 다정, 다범, 그리고 미은은 물에 잠긴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은 그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고, 비는 여전히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잔해물과 부서진 건물 사이를 헤치며 걷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같았다. 물살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흐르고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정숙은 물 속에 잠긴 장애물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두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다범을 걱정하며 자주 시선을 돌리곤 했다. 다범은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10초에 한 번씩 정숙이 이리와 안아줄게, 라고 말해도 고개를 세차게 돌리곤 했다.


그러던 중, 다범이 갑자기 콜록, 기침을 했다. 그 소리는 비 소리와 물결 소리 사이에서 어머니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숙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프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정숙은 물 속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다범의 얼굴을 살폈다.


다범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의 말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른스러웠지만, 그 작은 몸은 여전히 차가운 물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침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다범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다.


정숙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다정을 돌아보았다.


"너는 동생이 아픈데 한 마디도 안 하냐?"


정숙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누나가 되어서 동생을 저리 돌보지 않는지, 정숙은 답답했다.


다정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정숙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물 속에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며 피곤에 지쳐 있었다.


"기침 한 번 한 거 가지고 왜 그러세요."


다정은 투덜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물이 몸을 휘감으며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동생의 기침이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기침을 했으면, 아니, 각혈을 해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을 거면서. 오히려 다범을 향한 어머니의 과한 걱정이 다정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정숙은 다정의 말대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랑 싸우자는거니? 라고 말하려는 순간, 다범이 갑자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마치 호두까기 인형처럼 척척 발걸음을 옮기며, 밝은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기 상어 뚜루루 뚜루~"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물결 소리 속에서도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봐요, 엄마. 쟤 멀쩡하잖아요!"


그녀는 동생이 이 험난한 상황에서도 활기차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안심한 듯, 어머니에게 동생의 건강을 강조했다.


정숙은 여전히 다범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범이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다정의 말에 잠시 말을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은은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모네 집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이모와 이모부는 시도 때도 없이 싸웠고, 그 싸움은 언제나 폭발 직전이었다. 물건이 날아다니고,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미은은 그 혼란스러운 집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던 어린 소녀였다.


그 당시, 미은은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일부러 바보같이 행동하곤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못알아 듣는 척을 했더니 어처구니 없다며 웃었다.


”우이동에 있는 사일구탑…? 사리곰탕이요?"


미은은 어른들의 싸움을 막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으며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


"오렌지가 삼겹살보다 더 살이 쪄요!"라고 말하며, 고의로 웃음을 유도했다.


그럴 때마다, 이모와 이모부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의 싸움은 잠시 멈추고, 웃음으로 변하곤 했다. 그 순간이 미은에게는 유일한 평화였다. 그 어린 마음으로, 미은은 어떻게든 그 집안의 폭풍을 잠재우려 애쓰고 있었다.


그 기억이 현재의 다범과 겹쳐졌다. 다범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다범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미은은 자신이 그 시절 느꼈던 고독과 두려움을 다시금 떠올렸다.


미은은 조심스럽게 다범에게 다가갔다. 물이 차오르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상황에서도, 다범은 여전히 밝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가 조금만 더 차오르면 이젠 다범이도 스스로 걷기 어려울 것 같았다. 미은은 자신이 이들을 곧바로 호봉산으로 보내지 않고 미나를 찾게 한 것에 대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범아, 괜찮아?"


미은이 눈썹을 내리며 묻자, 다범은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뭐가요, 누나?"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걱정도, 무거운 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밝고 천진난만한 미소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다범은 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덜미에는 이미 땀이 맺혀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다범은 여전히 해맑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길을 나아갔다. 물 속에서도, 그 작은 몸이 무거운 세상의 짐을 견뎌내고 있는 모습이 미은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미은은 그런 다범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강한 아이인지, 그리고 어쩌면 그 강함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물 속에서 길을 헤쳐나갔지만, 미은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다범이란 아이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신이 과거에 어른들의 싸움을 막기 위해 했던 행동처럼, 다범도 어쩌면 이 험난한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작은 몸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얼마나 클지 알 수 없었지만, 미은은 그의 씩씩한 모습을 보며, 그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이전 05화 1장 물에 잠긴 정산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