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제 더 못 걷겠어요…”
다정이 지친 소리로 말했다. 멀쩡한 날씨에 한 시간만 걸어도 발바닥이 아플텐데, 비를 맞으며 물살을 헤치니 피로감이 불쑥 솟았다.
미은은 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까만 밤처럼 어두워지고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길까지 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범은 정숙의 품에 안겨있었고, 정숙 역시 매우 지쳐보였다. 미은은 그들이 자신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볼이 뜨거워졌다.
“아, 미안해, 쉴 곳을 찾아보자.“
‘쉴 곳’이라고 해봤자, 아직 잠기지 않은 건물 지붕만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들은 물에 잠긴 계단을 올라 2층짜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옥상 문은 열려있었다. 발 아래의 시멘트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 위로 물줄기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를 피할만한 변변찮은 비닐 따위도 없었기에, 그들은 할 수 없이 옥상 문을 열어놓은 채로, 건물 안에 자리를 잡았다. 계단에 물이 흔들리며 찰랑, 찰랑 소리를 이따금씩 내었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미은은 배가 진동하듯 울리는 걸 깨달았다. 아침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건 저 세 사람도 마찬가지일텐데, 정숙과 다정은 그렇다쳐도 다범 역시 배고프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미은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턱을 괴고 내일 먹을 음식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굶어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미은은 입을 열었다.
”물이 언제 차오를지 모르니까, 번갈아 가면서 깨어있는게 좋겠어요. 내가 먼저 망을 볼테니까, 그 다음엔 다정이가, 그 다음에는 아주머니가 보는게 어떨까요?“
정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품 안에서 다범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어린 아이답게 고단함 속에서도 쉽게 잠이 들었지만, 그 작은 몸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듯했다. 다정은 그 옆에서 조금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었지만, 피로에 지쳐 곧 잠에 빠져들었다.
미은은 그들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미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이 지독한 폭우 속에서 미나가 무사할지, 제대로 살아있을지 걱정이 가득했다.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며, 옥상 문 밖으로 새하얀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건물 아래 찰랑이는 물 때문에 마음을 쉬이 놓지 못하면서도, 저 비를 잠시라도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 것은… 엄마가 사준 네 발 자전거였다. 분홍색 손잡이에 형형각색 샐로판지들이 메달린 그 자전거는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서울 중심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네 발 자전거를 타고 놀 때면, 동네 아이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며 깔깔대며 웃었고, 세상은 무한한 모험과 재미로 가득 찬 장소처럼 보였다.
아파트 밖은 위험하니까 나가면 안돼.
미은이 자전거를 끌고 나갈때마다 지겹게 들었던 말이었다. 미은은 미나를 그 자전거 뒤에 태우고, 부모 몰래 아파트 밖의 세상을 체험하러 나갔던 날을 떠올렸다. 숱하게 걸어다녔던 길이니 전혀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하늘이 맑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날이었다. 미은은 작은 미나를 자전거 뒤에 앉히고, 이 세상의 모든 재미와 흥미를 보여주고 싶었다. 과일을 파는 가게, 오래된 교회 등을 지나치며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미나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미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미나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미은의 등을 꽉 잡았다.
미은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그때의 흥분과 설렘이 다시금 그녀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넓은 세상을 미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마음이, 지금도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모험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모님이 금지한 곳까지 나갔을 때, 미은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위협을 느꼈다. 미나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 순간 미은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뒤를 돌아보니, 미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은은 그제야 자신이 부모님의 말을 어기고 너무 멀리 나왔음을 깨달았다.
순간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정전이 나듯 생각이 끊겼다. 자전거 바퀴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팽글팽글 돌아갔고, 그 옆에는 승용차 한 대가 어설프게 멈춰있었다. 미은은 순간적으로 온몸에 퍼지는 충격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미나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미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무릎에는 석류처럼 시뻘건 피가 맺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나는 언니를 향해 언니, 괜찮아? 라며 울먹였다. 그 작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미은은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퐁퐁 흘리면서 연신 말했다.
"미안해, 미나야. 미안해."
차에서 내린 아줌마가 헐레벌떡 두 자매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괜찮니? 부모님 전화번호 알아?”
그 뒤로 구급차가 와서 두 사람을 실어갔다. 미은은 가벼운 찰과상으로 상처 위에 밴드를 붙였지만, 미나는 다리에 석고를 붙이고 붕대를 감아야만 했다.
얼마 안되어 아빠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들을 찾아내어 품에 안아주었고, 미은은 아빠의 품에 안겨서 "잘못했어요…“ 라며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그 옆에서 미나는 더 크게 울며 말했다.
"내가 언니한테 가자고 했어. 내가 더 잘못했어…”
아빠는 두 딸을 혼낼 생각이 없었다. 그저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안도할 뿐이었다. 두 자매가 서로 잘못했다고 울음을 터뜨리자, 아빠는 걱정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아빠는 두 자매에게 피자를 사주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파마산과 핫소스를 잔뜩 뿌려 먹은 그 피자의 맛은, 눈물과 함께 여전히 미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미은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의 미나는 다친 무릎을 붙잡고도 언니를 걱정하며 "언니, 괜찮아?"라고 묻던 순수한 아이였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미나가 자신을 찾아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둠 속 물살을 헤치며 당장이라도 동생을 찾으러 나서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미은은 다시금 눈을 뜨고 어두운 문 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올 셈인지 알 수 없었다. 자고 나면 비가 그치고, 상황이 정리되어 누군가 그들을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게 코를 고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은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