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은 어두운 정류장에 서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한 여인이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민혁은 그녀를 보고 외쳤다.
“엄마!”
그녀는 민혁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피곤에 지쳐 있었고, 항암 주사를 맞은 후인지 창백하고 힘겨워 보였다. 그녀는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고, 정산행 버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민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엄마!"
그는 급히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 정산에 오면 안 돼. 위험해.“
민혁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엄마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 제발. 이모네 집으로 돌아가, 응?"
민혁은 다시 한번 엄마의 팔을 세게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정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를 반드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묵묵히 정산행 버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돼! 타지 마!"
민혁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고, 온몸이 떨렸다. 엄마가 버스를 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은 공포가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나 엄마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버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에 쩔어 있었고, 창백한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버스가 천천히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민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버스에 타려는 엄마를 붙잡고 막으려 했지만, 엄마는 갑자기 그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일어나!"
엄마는 갑자기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는 민혁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강렬함으로 그의 귀에 울렸다. 그 순간, 민혁은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헉!"
등 뒤가 축축했고, 귀에 간지러운 느낌이 스며들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는 설마하는 불안감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찰랑찰랑, 물이 손끝에 닿았다. 차가운 물의 감촉이 그의 피부에 확연히 느껴졌다.
민혁은 순간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뒤 꺼져 있던 렌턴을 허둥지둥 켜고 주변을 살폈다. 렌턴의 불빛이 비춰주는 장면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다. 물은 이미 옥상을 덮을 정도로 차올라 있었고, 차가운 물결이 출렁거렸다.
민혁의 마음은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옆에 누워 있는 승우를 붙잡았다. 한 손으로는 아직도 물에 젖어 무겁게 늘어진 모기장 텐트를 마치 암막 커튼을 걷어내듯 거칠게 집어치웠다.
“야!"
민혁의 외침이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승우는 민혁의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곧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승우는 옥상 위로 차오른 물을 바라보았다.
출렁이는 물결이 그들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빛을 받으며 은은하게 반사되는 물의 움직임이 마치 악몽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승우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장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물은 계속해서 차오르고 있었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 아직 안 잠긴 지붕 보이지?"
승우는 민혁에게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지붕을 가리키며 외쳤다. 물 위로 겨우 머리만 내민 작은 빨간 지붕이었다.
"저기까지 헤엄칠 수 있어?"
민혁이 잠시 그 지붕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승우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재빨리 챙겨들고는 민혁에게 외쳤다.
"따라와!“
승우는 몸을 낮추며 물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처음으로 몸에 물을 던졌을 때, 수영장에서의 익숙한 감각이 떠올랐지만, 이곳은 수영장이 아니었다. 야생의 재난 속에서 진짜 물살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심장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물 위로 차오르는 공포가 그를 감싸는 듯했다.
승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어 공기를 폐에 가득 채워 넣었다. 이제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다시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물속에서 발을 움직이며, 승우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의 저항이 그의 온몸을 덮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공포스러운 상황이 그를 더욱 자극했고, 그가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어떤 물체가 승우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본 것은, 녹슨 고철 같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민혁 쪽으로 다가가 부딪히는 장면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승우는 공기를 뱉으며 소리쳤다. 물속에서 나오는 외침은 거품으로 터져버렸고, 그 순간 민혁이 힘없이 물 속으로 나자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승우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가방을 내팽겨치고, 민혁을 향해 물속으로 돌진했다. 다리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힘차게 발을 뻗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막혀 눈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그를 덮쳐왔다. 민혁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승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민혁의 팔을 낚아챘고, 이를 악물고 민혁을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민혁의 무거운 몸이 물 속에서 떠오르며, 승우는 간신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승우는 민혁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가장 가까운 전봇대 쪽으로 끌고 갔다. 물살이 계속 그들을 밀어내려 했지만, 승우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드디어 전봇대를 붙잡고 가까스로 멈췄을 때, 그의 온몸은 마치 산을 오르듯 지쳐 있었다.
"이대로는 저 지붕까지..."
승우는 숨을 몰아쉬며 전봇대를 붙잡고 민혁을 살폈다. 기절한 듯 했지만 숨을 제대로 쉬고 있었다. 승우는 곧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 딛고 설만한 지붕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폴댄스처럼 전봇대 하나를 잡고 계속 있을 순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물살이 그들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승우는 절박하게 상황을 계산하려 애썼다. 그때, 어디선가 어이, 학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남색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모터보트를 몰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모터의 소음이 물 위에서 울려 퍼지며, 긴장된 순간을 깨뜨렸다. 승우와 민혁은 전봇대를 붙잡고 물살에 휘말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보트를 민혁과 승우 가까이로 몰고 왔다.
"어서 타!"
아저씨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승우는 민혁을 먼저 끌어올리고, 자신도 간신히 보트에 몸을 실었다. 물에 젖어 지친 몸이 비로소 안전한 곳에 닿자, 승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승우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잠시 동안 다정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변했다.
“저, 아들을, 찾고 있는데." 아저씨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잠시 승우와 민혁을 응시하다가, 핸드폰을 꿈지럭 거리더니 곧 사진을 승우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얘를 본 적 있니?"
승우는 사진을 보자마자 숨이 멎는 듯했다. 사진 속 남자는, 자신이 뒷산에 놓고 온 다리를 다친 학생이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고,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승우는 자신이 불안해 보일까 걱정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아저씨는 승우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승우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가슴 속 불안감이 커졌지만, 그는 이를 숨기려 애쓰며 간신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못 봤어요,"
승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아저씨는 잠시 동안 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구나..."
아저씨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축 처져 있었다. 승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거짓말이 마음속 깊이 죄책감으로 남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이상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터보트는 다시금 속도를 내며 물 위를 가르기 시작했다.
승우는 되도록 빨리 이 보트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민혁이 깨어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아저씨의 배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아직도 아저씨가 물었던 질문과 그 사진 속 소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민혁이 깨어날 때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물결 위에서 흔들리는 배와 함께 승우의 마음도 계속해서 요동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이 가쁜 숨을 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웠지만, 곧 승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승우는 조심스럽게 민혁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겪었던 일과 아저씨와의 만남을 짧게 설명했다.
"...다행이야."
승우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대충 제일 빨리 보이는 지붕에 내려달라고 하자.”
하지만 그 순간, 배 뒤쪽에서 아저씨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이 괴상하게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 비명은 배 위의 모든 공기를 압도하며, 승우와 민혁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화들짝 놀란 승우와 민혁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아저씨는 물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푸른 튜브 같은 물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내 그 물체의 부어오른 발목과 핏기 없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에는 빨간 초코파이 과자봉지가 마치 보물처럼 꽉 쥐어져 있었다. 그 순간, 승우와 민혁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의 심장은 한꺼번에 멈춰버린 것 같았고,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두 사람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그 광경을 응시했다.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고, 머리 속에서 경고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시선은 아저씨가 건져 올린 물체, 아니, 시체에 고정되었고,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느껴졌다.
민혁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승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승우의 얼굴을 본 순간, 민혁의 심장은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승우는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초점 없는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민혁은 승우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순간, 민혁은 승우가 이미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괜찮아?"
민혁은 간신히 말을 꺼냈지만,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 속에 스쳐가는 작은 소리일 뿐이었다. 그들의 주위는 여전히 혼돈으로 가득했고, 그 순간 민혁과 승우는 마주한 현실의 무게에 숨이 막힐 듯했다.
아저씨의 울부짖음이 계속해서 배 위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그들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혔다. 승우와 민혁은 이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