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은은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새벽에는 그저 흐린 날씨였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빗줄기가 조금씩 창문에 툭툭 스치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방울들이 창문을 때릴 때마다, 미은의 마음속에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가기 싫다. 차라리 비가 억수로 왔으면 좋겠어.
학교에 가기 싫다고 누군가에게 칭얼대본 적이 언제였던가. 미은은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탁상 위에 놓인 액자 속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사진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그녀의 작은 불만에도 귀를 기울여 주었고, 아빠는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곤 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그 미소 안에서 사라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미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오늘은 학교 쉬자. 대신 우리 집에서 맛있는 걸 만들어 먹자’라며 다정하게 말해줬을 것만 같았다. 아빠는 뒤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가끔은 학교가 싫을 때도 있지. 다 그런 거야’라며 그녀를 다독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여기 없었다. 사진 속에만 남아 있는 그들의 미소는 그녀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담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미은은 더 이상 그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징징거리며 엄마 품에 안길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이제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은은 손끝으로 액자를 살짝 만지며, 그리움이 가슴 깊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젖히며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더 이상 날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사진 속 부모님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미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다잡았다. 이젠 내가 미나를 지켜야 해.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그녀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사진 속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고는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미은은 곧 미나를 깨우기 위해 미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나의 방은 분홍색 벽지와 부드러운 조명으로 꾸며져 있어 언제나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포근함조차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방 문을 열자, 미나는 이불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고, 방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미은은 조심스럽게 미나의 침대 옆에 앉아 참새같이 작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미나야, 일어나. 학교 가야지.”
미나는 마치 이불 속에서 깊이 잠겨 있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은은 조금 마음이 지치는 듯 했다. 알아서 혼자 잘 일어나주면 좋을텐데. 그녀는 조금 더 강하게 미나의 어깨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빨리 일어나. 늦겠어.”
미나는 몸을 돌려 미은의 손에서 어깨를 빼고, 이불을 얼굴 위로 더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언니, 5분만… 아니, 10분만 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그 순간, 미은의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요 며칠 동안 미나는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고, 미은은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모든 책임이 미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봐야 했고, 학교 생활과 집안일 모두를 혼자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미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굴며,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안 돼!”
미은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일어나. 너 때문에 나까지 늦어!”
그녀는 미나의 어깨를 더 강하게 흔들며 화를 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젠 제발 좀 알아서 해!”
미나는 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미은은 가슴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눈물은 침대 시트에 스며들었지만, 미은은 이를 보지 못했다. 미은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지금 뭐하는거야? 학교 안 가?"
미나가 침묵으로 대꾸하자, 미은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하네, 진짜.
미은은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꽉 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어번 세게 때렸다. 통증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 내쉬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제 미리 준비해둔 반찬들을 꺼내 밥을 차렸다. 밥을 입맛 없는 입 속에 밀어넣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미나가 얼른 일어나 준비를 하고 밥을 먹으러 와주길 바랐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0분 뒤에 나와!” 미은은 소리쳤다. “안 그러면 나 혼자 갈 거야.”
미나가 침대에서 조금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은은 얼굴을 붉히며 더욱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밖에서는 비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굵어진 빗방울들이 그녀의 노란 우산 위로 쏟아지며 탁탁 소리를 냈다. 하지만 미은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나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죄책감이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는 생각이 그것을 덮어버렸다. 아침부터 이렇게 힘들면 하루 종일 기분이 엉망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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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은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어제 그 드라마 봤어? 따위의 잡다한 대화도 없었다. 평소처럼 활기찬 소음 대신, 학생들 사이에서는 침묵과, 간간히 불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은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곤 흠칫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은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날씨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미은아, 밖에 봤어? 저렇게 운동장에 물 찬거 본 적 있어?”
한 친구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미은은, 자신도 처음 보는 광경이라며, 불안감을 공유했다.
“선생님 회의 때문에 늦으신데. 다들 자습하고 있으래.”
교무실에서 돌아온 반장이 칠판 앞에 서서 말하자, 교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반장이 두 세 차례 경고를 준 후에야 교실이 조용해졌다. 미은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음악 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리면서,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덜어주는 듯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창문을 사정없이 때렸다. 마치, 세차장에 들어온 자동차 유리와 같았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빛도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어두웠고, 빛이 아닌 무언가가 창문을 가리고 있는 듯 했다.
발가락을 까닥거리던 미은은 어쩐지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꼬며 느낌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곧 배 속에서 알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제야 그녀는 이 통증이 뭘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 하필 지금...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생리대 중형 사이즈 한 장을 꺼냈다. 이 찝찝함이란, 지옥 똥통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벌에 처한 느낌이나 다름 없었다.
미은는 생리대를 챙겨 조용히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복도를 서둘러 걸어갔다. 학생들이 모두 등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는 마치 텅 빈 방과후 겨울의 어느 날 같이 싸늘했다. 하지만 배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그녀는 그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은은 불투명색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장 안쪽 칸에 자리를 잡았다.화장실의 차가운 공기와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려놓고 생리대를 꺼냈다. 언제나 이런 일이 생기면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걸까. 그녀는 몸을 낮추며 천천히 생리대를 차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는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저 모든 걸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점점 복잡해지기만 했다. 미나에게 괜히 더 짜증내버렸어. 나도 모르게 더 말이 거칠어졌어.
미은은 생리대를 제자리에 고정하면서,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죄책감을 떨쳐내려 했다. 그래도,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잖아. 미나는 분명 울었을꺼야. 나… 혹시 미나가 울기를 바란건 아니었을까? 진짜 최악이야. 미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톱 근처에 난 살을 뜯었다. 살이 작게 뜯어지면서 그녀는 약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은은 생리대를 다 착용하고도 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봤다. 마음속이 어수선해서 그런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음악이 귀에 울렸고, 그 사이에 복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은 그녀의 신경에 닿지 않았다.
화장실에 있는 동안, 그녀는 거의 뜯어진 살을 이리저리 굴려대며 오히려 더 편안해지고 있었다. 화장실 문 밖에서 점점 커지는 소음도, 누군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발소리도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음악에 가려진 채, 그녀는 그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괜찮아, 미나도 이해해줄 거야. 미은은 자신에게 되내였다. 이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묵직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을 때, 그녀는 그제서야 이상한 점을 느꼈다. 복도에도, 복도 너머 교실에도, 더 이상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가 마치 무언가에 삼켜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체육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은이 고개를 돌리자, 헐렁했던 선생님의 회색 바지는 물에 푹 젖어서 레깅스처럼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미은을 향해 소리쳤다.
"야! 너 여기서 뭐해!? 빨리 집에 가! 얼른!"
미은은 심장이 말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미 빗물이 넘실대며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은 점점 더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고, 학생들은 이미 대부분 대피한 상태였다.
미은은 손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가방은? 소지품을 챙겨야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다시 반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고 급히 학교 밖으로 나가려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순간 잘못 들은거라 생각했지만, 분명히 흐느끼는 남자의 소리였다.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여기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미은은 갈등했다. 심장이 요동을 쳤다. 발가락에 차가운 느낌이 들자, 미은은 재빨리 시선을 숙였다. 이미 복도에도 물이 스름스름 퍼지고 있었다. 창백해진 미은은 좀 전 자신을 부른 선생님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저 멀리 선생님도 이미 문 밖을 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여기에는 혼자 뿐이다.
어떡하지? 지금 빨리 나가야 해...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이 그녀를 움직였다.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
미은은 마음을 굳히고 도움을 요청한 방향으로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심장 소리가 배가 되어서, 귀에 웅웅 울려댔다. 1층 복도에서 돌아서자, 한 학생이 넘어져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학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주변에는 물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괜찮아?"
미은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발목이… 못 일어나겠어."
미은은 거친 숨을 애써 골랐다. 자기마저 패닉에 빠지면, 둘 다 이 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걱정 마. 도와줄게."
그녀는 학생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발목을 다친 학생은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는 것 조차 어려워 보였다. 체구도 미은보다 커서, 일으키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미은은 어쩐지 울고싶어졌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지지하고… 다른 발로 일어나봐.“
곧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의 육중한 무게가 자신을 짓눌렀다. 미은은 이를 꽉 깨물며 넘어지지 않도록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 사이, 물은 점점 더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복도 바닥은 물론 발목까지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미은은 곧 물이 허리까지 차오를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쿠르릉, 쿵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미은은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빨리."
미은은 어렵게 일어선 학생을 간신히 부축하며 말했다. 물살은 점점 더 거세졌고, 그들이 움직일수록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미은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물이 이미 발목을 넘어서 허리까지 차오를 기세였다.
미은은 발목을 다친 학생을 부축하며 물이 점점 더 빠르게 차오르는 복도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물살은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점점 더 몸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혼자 걷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물은 이제 허리 높이까지 차올라서, 그녀와 학생의 몸을 뒤흔들며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다.만약 학생이 넘어진다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러다 우리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어.
미은은 힘겹게 발을 내디디며 안간힘을 썼다. 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녀의 팔에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물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복도 뒤편에서 거대한 소음이 들려왔다. 미은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쾅!
마치 벽이 무너져 내리듯, 토사물 같은 흙물을 따라 책상과 의자들이 어지럽게 엉킨채로 복도를 가득 채우며 거센 물결과 함께 와장창 쏟아져 나왔다. 천둥같은 소리와 함께 나무와 쇠들이 쏟아지면서 미은과 학생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물살에 휩쓸리며 떠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안 돼!"
미은이 다급히 도망치듯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미은은 고개를 돌려 교실 문을 쳐다봤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밖의 창문에서 콸콸 들어오는 빗물에 이미 교실 조차 물에 잠겨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 그때, 또 한 번 굉음이 울렸다.
콰콰쾅!
숨 막히는 공포감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학생을 부축한 채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둘 다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눈앞에 덮쳐오는 거대한 물결과 함께 밀려오는 책상과 의자들. 평소에는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아이들에게 낙서 자리를 내어주던 그 가구들이, 돌연간 묵직한 흉기가 되었다. 그 중 가장 툭 튀어나온 책상 모서리가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미은의 시선에 꽂혔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미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 미안해, 하면서 닭똥같은 눈물을 퐁퐁 흘리는 얼굴이었다. 미은은 기가 찼다. 하필 마지막 네 모습이 슬퍼하는 모습이라니. 이것밖에 안되는 언니라서 미안해. 그녀는 이미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벗어나, 바닥이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더 미안해.
그러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미은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갑자기 모든게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매쾌한 물이 그녀의 얼굴에 튀었고, 허리 옆으로 의자가 과속하는 포르쉐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는 그녀와 같은 교복을 입은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물살 속에서 마치 파도에 떠밀려 온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구해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승우가 외쳤다. 그는 눈앞에 쏟아지는 책상과 의자들을 재빨리 피해가며, 미은의 팔을 있는 힘껏 당겼다. 민혁은 뒤에서 다친 학생을 붙잡아 부축하며, 그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안 돼! 피해야 해!"
민혁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그의 두 팔은 강하게 다친 학생을 붙들고 있었고, 그의 체격은 왜소해 보였지만, 그 힘은 놀라웠다. 마치 거대한 파도를 몸으로 막아내듯, 민혁은 밀려오는 물살과 책상, 의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승우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가장 안전한 경로를 찾고 있었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번뜩이며, 물살과 가구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갈 틈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빨리!"
승우가 외치자, 그들은 승우를 따라 재빨리 움직였다. 민혁은 엄청난 힘으로 탈진해버린 학생을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부축하며 앞장섰고, 승우는 그들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가구들과 물살 사이를 재빨리 빠져나갔다.
미은은 간신히 몸을 가누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녀는 여전히 놀란 상태였지만, 두 남자의 등장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살 수 있다는 희망마저 느껴졌다.
"다 왔어! 계단으로 가자!"
승우가 외쳤다. 그들은 물이 차오른 복도를 빠르게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하나 딛으면서 물이 미처 닿지 않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자, 쏟아지는 물살이 미은은 물귀신처럼 잡고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미은이 흔들리며 균형을 잃을 듯하자, 민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학생을 지탱하고 남은 한 손으로 미은의 멱살을 꽉 잡아 위로 이끌었다. 물에서 벗어났음에도, 미은은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롯처럼, 그녀는 황망한 표정을 한 채 한 층을 거의 다 채워올라가는 물살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책상과 의자를 바라보았다.
“야! 정신차려!”
민혁이 소리치자, 그제야 미은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2층에 도착했을 때, 승우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탈출 경로를 찾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침착했다.
"여기서도 안심할 수 없어. 체육관 건물이 뒷산이랑 이어져 있어. 그쪽으로 가자. 그게 제일 안전할 거야.“
"괜찮아?" 승우가 민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민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여전히 학생을 부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갈 수 있어."
미은은 그들을 바라보며 괜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나타난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학생은 이미 물살에 휩쓸려갔을 것이다. 이들과 함께라면 이 학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꺼냈다. 미나에게 연락을 해야했다. 하지만, 물에 젖은 기기는 전원조차 켜지지 않았다. 그런 미은을 바라보던 승우가 말했다.
"…여기서 나가서 연락해도 늦지 않아. 지금 바로 가자."
미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서둘러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