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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등대 Aug 13. 2024

1장 물에 잠긴 정산 3

뒷산에 오른 미은은 서둘러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을 듯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평온했던 정산 마을은 이제 물에 잠긴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고향이 아니었다. 빗줄기는 끊임없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고, 그 물살이 마을을 마치 거대한 손으로 휩쓸어버린 것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마치, 노아의 방주에서 쫓겨난 세계를 보는 듯 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운하는 이미 범람하여 주변의 도로와 건물들을 집어삼켰다. 흙탕물은 진흙과 쓰레기, 그리고 부서진 잔해들을 함께 끌고 다니며 마을 전체를 거인이 놀다 버린 색종이처럼 뒤엉켜 놓았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도로 위에는 물에 잠긴 자동차들이 한가닥 희망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물살에 떠밀려 건물이나 다리 아래에 처박혀 있었고, 그 안에서 창문을 부수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의 손짓이 보였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구조를 외쳤지만, 폭우와 물살의 소음에 그 소리가 묻혀버렸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간신히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떤 이는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버티고 있었지만, 그 노력은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부서진 다리 위에는 다친 사람들이 속출했고, 그들은 간신히 몸을 가누며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몇몇은 이미 힘이 다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고, 다른 이들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과 곡소리는 그녀의 귀를 찢어놓을 듯했다.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마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소리처럼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미은의 시선은 마을의 건물들로 향했다. 익숙했던 집들이었지만, 이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몇몇 집들은 이미 물 속에 잠겨 거의 보이지 않았고, 일부는 기울어진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건물의 창문 밖으로 흙탕물이 밀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그 속에서 한때 따뜻했던 가정이었을 공간이 이제는 파괴된 잔해로 변해 있었다.


도로 위의 떠다니는 물체가 그녀의 눈에 가장 강하게 박혔다. 몇몇은 물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가, 물살에 밀려나와 다시 떠올랐다. 마치 이리저리 떠밀리며 마치 물 속에서 끈이 풀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흘러다녔다. 어떤 이들은 건물 잔해에 걸쳐 있었고, 그 위에서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했다.


미은은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마치 악몽 속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이건 꿈일 거야… 그녀는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녀의 눈앞에 뚜렷하게 존재했다. 눈을 질끔 감았다 떠도 그 장면 그대로, 아니, 더 악화되고 있었다. 꿈이 아닌, 생생한 악몽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땅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순간에,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지만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미은은 마치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생기는거야?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고, 몸은 마치 돌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만 같았다. 마을 전체가 종말을 맞이한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미은의 옆에서 승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안 돼. 시간이 없어."


승우는 이미 미은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면서도 결단력이 서려 있었다.


“핸드폰도 먹통이고, 뒷산도 안전하지 않아. 물이 계속 차오르고 있어. 여기에 머물다가는 우리도 위험해질 거야."


승우는 바로 떠날 준비를 하며, 민혁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식수를 구해야 해. 물이 오염되면 생존이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호봉산으로 가자. 거기가 지금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야."


민혁은 승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보기에 승우는 누구보다 명석했고, 상황을 빠르게 분석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민혁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은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민혁은 미은과 동급생을 두고 승우와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민혁을 바라보던 승우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결국 미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 우리는 호봉산으로 갈 거야. 거기로 가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져. 같이 가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미은에게는 그 차가운 목소리가 마치 진심으로 같이 가자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밀어내는 것처럼 들렸다.


미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난 동생을 찾아야 해. 동생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흐느낌마저 참는 듯 했지만, 눈에는 두려움과 결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미나는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승우와 민혁을 따라 호봉산으로 가는게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동생 없이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승우는 미은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민혁을 위해 그녀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네가 동생을 찾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네 동생이 어디있는지 어떻게 알지?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 우리랑 같이 가면, 호봉산으로 가는 길에 어쩌면 네 동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미은은 완강히 거절했다. "아니, 바로 가서 찾아야 해... 호봉산만 보고 가다보면 놓칠지도 몰라."


미은의 말에 승우는 고개를 숙이고 땅 끝을 바라보다가 민혁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우리 이름을 기억해. 내 이름은 승우, 그리고 이 친구는 민혁이야. 네가 동생을 찾으면, 호봉산에서 만나자.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가서 자리를 잡을 거야. 거기로 와."


미은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미나를 찾아야 한다는 강한 결단은 갖고 있었지만, 혼자 폭우가 치는 마을로 가려니 외로움과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미나를 생각하며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없는 힘마저 생기는 기분이었다. 반드시 찾을 수 있을거야. 그래야 해.


미은이 먼저 발걸음을 옮겨 시야에서 사라지자, 민혁이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학생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발목을 감싸쥔 채 아픔을 참고 있는 듯했지만, 이 상황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그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민혁의 마음속에는 이 학생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갈등이 일고 있었다.


“…혼자 남기면 위험할 거야, 우리가 데리고 가야해.”


민혁은 결국 속마음을 꺼내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 따듯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승우는 망설임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우리가 모두 위험해질 수 있어. 학교 뒷산과 호봉산은 달라. 지금은 우선 우리가 살아남는 게 중요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으면 그때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구하면 돼."


이 순간에도 그는 가장 논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고, 그 결정에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민혁은 승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시 깊은 갈등이 일었다. 그는 항상 승우의 판단을 신뢰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판단이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또 다시 한 번 승우를 믿기로 결정했다.


"알겠어."


민혁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작은 따듯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 따뜻함은 이번에도 승우의 차가운 이성에 묻혔다.


승우는 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물기와 떨림이 짧은 순간, 그가 이 상황에서 느끼는 압박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승우는 주머니에서 '정'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빨간 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험한 여정 탓에 뭉개져버린 마시멜로와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달콤함은 없었지만, 그것은 지금 승우에게는 면죄부와도 같았다.


승우는 학생에게 다가가 과자 봉지를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의 식량은 될 거야. 물은 신발을 벗어서 빗물을 받아 마셔. 그리고 발목이 낫는 대로 가능한 눈에 띄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의 말은 짧고 간결했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의 논의나 설득은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이 학생도 그 결정을 따라야 했다. 학생은 두려움과 고립감에 몸을 떨며 승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승우가 건넨 봉지를 받으면서도, 눈에 물기가 고여있었다. 한 손으로는 봉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아픈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데려가 줘…’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입술은 떨릴 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승우의 단호한 표정에 그는 더 이상 말할 용기가 없었다.


승우는 학생의 눈빛을 잠시 마주했지만, 곧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구구절절한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 승우는 등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와 함께 민혁도 그 뒤를 따랐다.


민혁은 떠나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학생은 이제 그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혼자 남겨져 있었다. 두 손으로 뭉개진 과자 봉지를 쥐고, 천천히 그것을 뜯고 있었다. 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그들은 점점 학생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 사이 학생은 혼자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듯, 과자 봉지를 손에 꼭 쥐었다. 그는 민혁의 등 뒤로 시선을 보내며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하러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입에 음식을 넣었다. 그 작은 행동이 그의 유일한 생존 본능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승우와 민혁은 학생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학생은 홀로 남겨진 채, 그들이 준 작은 희망에 의지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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