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원에서 처음 목욕을 하는 신생아들의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몸에 물이 닿자마자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낯선 손 안에서 목욕이 끝날 때까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는 아기도 있다. 아마도 우는 아기는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가능성이 크고, 가만히 있던 아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한 기질을 지녔을 거다.
엄마 말을 따르면 나는 후자였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엄마는 나를 포대기에 둘둘 싸서 화장실 앞에 놓아두고 샤워를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세 살배기 오빠는 이때다 싶어 나를 차디찬 골방 책상 밑에 밀어 넣곤 했단다. 어린 나는 울음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던 모양이다.
돌 무렵, 오빠가 내 손을 깨물어 여린 손톱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때도 가만있었다고 한다. 놀란 엄마가 작은 양말을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꼭 끼우고 있어.”라고 말하자,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게 든 채 아장아장 걸어 다녔단다. 엄마는 내 어린 시절을 한마디로 정리하셨다. “너는 어릴 때 키운 것 같지도 않았어. 지금도 순하지만.”이라고. 그렇다. 난 그렇게 태어났다. 남들이 발로도 키운다 할 만큼 순하게. 요즘 말로 하면, 유니콘 베이비. 그게 나였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키우기 수월한 아이 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평온하고 무딘 아이로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 작은 가슴 안에서 나는 매일 전쟁 중이었다.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이 모여 놀면 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같이 놀고 싶었다, 나도. 하지만 먼저 가서 놀자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누가 와서 굳이 잡아끌지 않는 한, 나는 관심 없는 척 멀리 떨어져 혼자 놀았다. 멀리 떨어진 아이들의 숨소리까지 다 신경 쓰면서.
다른 남자아이가 일부러 건 발에 흉하게 넘어져도 털고 일어나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 마!'라던가, '선생님한테 이른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벨 누르는 것 하나도 두근두근했고, 마트에서 정당하게 돈을 내고 물건을 사는 일도 나에게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였나,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호출한 일이 있다. 늘 오빠 선생님에게만 전화를 받던 엄마는 의아해하며 학교로 가셨다. 당시에 나랑 같이 어울리던 친구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 눈에 내가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것으로 보였단다. 그래서 그 친구와 거리를 두기를 조심스럽게 권하셨다. 그렇다. 나는 상대가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는 아이였다. 싫어도 '싫다.'는 말이 목구멍 안에 가시처럼 콕 박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 신경 쓰지 않고 내 갈길 가는 성격이었다면 상관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늘 부러웠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싸', 또는 '대문자 E'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이다. 인싸는 학창 시절 어느 교실에나 있었고, 학교를 벗어나자 회사에도 있었으며,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지금도 주변 어딘가에 있다. 강한 존재감을 내뿜으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어딜 가든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했고, 불편한 말도 기분 나쁘지 않게 툭 웃으며 말하고 싶었으며, ‘멋짐’이 덕지덕지 붙어 존재만으로도 눈에 띄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성격도 소심한데 외모마저 순해 보였으니 중심에서 아주 한참 먼 곳이 내 자리였던 것을.
나는 유순한 가면을 쓴 채, 그렇게 매일 혼자만의 전쟁을 치렀다. 순해 보인다고, 얌전하다고, 잘 웃는 밝은 아이라고, 유니콘 베이비이기 때문에 '저 아이는 절대 괜찮을 거야.'라고 믿으면 안 되는 이유다.
커서는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대학교 때 난 늘 K, H와 함께 다녔다. 우리 셋은 모두 시각디자인 전공, 실내디자인 부전공이었다. 당시 실내디자인 과제는 주로 '오토캐드'라는 프로그램으로 도면을 만들었는데, 창문, 벽, 가벽 등 여러 라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양새였다. 벽의 두께에 따라 굵기를 다르게 설정해야 했지만, 다른 컴퓨터에서 열면 굵기가 모두 통일되어 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즉, 집에서 작업한 파일을 학교 인쇄용 컴퓨터에서 출력하려면 굵기를 다시 조정해야 했다(20년 전 이야기다).
아마 친구 K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아 이거 왜 이런 거야.” 출력용 컴퓨터에 앉은 K의 당황한 손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굵기를 빨리 다시 조정하면 될 일인데...... 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깨달았다. '너, 네가 과제를 한 게 아니구나?' 아니나 다를까 K는 어딘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굵기가 다 똑같은데 왜 이런 거예요? 예, 예.” 그녀가 겨우 도면을 출력해 내는 동안 나는 조금씩 화가 났다. 출력을 마친 K는 뒤돌아 나를 향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척 동생이 조금 도와줬어.” 평소에는 똑똑하게 굴던 이 친구는, 세 살짜리가 봐도 알아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당시 시각디자인 수업은 A, B, C 세 반으로 나눠서 수업이 진행됐고, 일일이 출석체크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 앞에서는 세상 사근사근한 K는 출석도 요령 있게 빠져나갔다. 교수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K의 출석부는 늘 ‘출석’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어느 날 K와 둘이 건물 복도를 같이 걷던 중, 한 여자 교수님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그녀의 시선 끝에 나는 없었다. 평소 본 적 없는 함박웃음을 한 그녀는 곧장 K에게 향했다. “엄마한테 핸드백 잘 받았다고 말씀드려.” K는 당황한 듯 나를 흘긋 쳐다봤다.
핸드백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학생이 교수에게 핸드백을 왜? 혹시 학교에서 독일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에 K가 뽑힌 것이 핸드백 덕이란 말인가? 그간 강북을 그렇게나 무시하더니, 집이 얼마나 잘 살길래. 아니, 교수한테 뭘 갖다 드린 게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그걸 받은 교수는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 없이 꽉 막힌 나에게 그녀의 행보는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 호프집, 바 등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내 손으로 학비를 벌었다.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꼬박꼬박 교실에 들어갔으며, 350만 원 학비의 무게를 알기에 누구보다 성실하게 과제를 해왔던 나였다. 그런데 결과가 이거라니, 혼란스러웠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복도에 울리는 웃음소리 때문인지, 편하게 세상사는 방법을 일찍 터득한 그녀에게 화가 나서인지, 나는 평생을 가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인지, 유난히 마음이 시렸다.
이래야 하는 거였나. 돈 주고 과제 사고, 핸드백을 쥐어주며, 교수님 팔짱도 좀 끼고 그랬어야 하나. 다른 사람에게 사근사근하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 친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이,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사회생활 잘할 성격은 못된다는 걸. 이렇게 화가 나는 걸 보면 평생을 가도 K처럼 되기는 힘들 거라는 걸. 이 성격이 앞으로도 내 발목을 붙들고 계속 늘어질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