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유행하기 이전, 혈액형별 뇌구조 그림이 유행한 때가 있었다. A형 뇌구조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장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그 주변은 여섯 개의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정리정돈, 막연한 근심과 걱정, 쿨하고 싶은 열망, 해야만 하는 일, 타인의 단점을 발견하는 능력, 그리고 완벽주의. 마지막으로 아주 작은 점으로 긍정적인 마인드가 점으로 찍혀 있다.
정리정돈만 빼면 나머지는 정확히 나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일이 일상이다 보니 배려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다른 사람을 향한 레이더가 발달해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단점이 눈에 탁 걸린다. 의심도 많은 편이라 사기꾼에게 쉽사리 당하기 어렵다. 해야 할 일을 리스트로 만들어놓고 지워 나가는데 희열을 느끼지만, 남아있는 리스트를 볼 때마다 강박을 느끼는 피곤한 면도 있다. 어떤 책에서는 지금을 즐겨라,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말이 쉽다. 대차게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멈출 것이며, 그물처럼 얽힌 생각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걱정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듯 평생을 쿨한 사람을 동경했지만,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그러기엔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자, 뇌구조로 보면 나는 전형적인 A형이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역시 난 A형이니까 그래’라고 단정 지어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어떨까? 혈액형하고 잘 들어맞을까?
남편과 나는 모두 AO형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세 명의 아이가 있다.
첫째는 신촌의 한 개인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남편과 둘이 일본에 살 때였는데, 친정에서 몸을 풀 생각에 34주쯤 한국행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많이 먹고, 실컷 놀 작정이었다. 하지만 36주 5일이 되던 날, 아이는 느닷없이 문을 두드렸다. 첫 아이 출산은 쉽지 않았다. 꼬박 하루가 걸린 후에야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름은 남편이 온갖 작명 사이트를 뒤진 끝에 '준우'라고 지었다.
준우는 조리원에서부터 배고프다고 우는 아기가 아니었다. 아기가 도통 울지를 않으니 조리원 간호사님도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다. “산모님, 다섯 시간 지나도 안 일어나면 그냥 호출할게요.”라더니 숙면 중인 나를 깨웠다. 90일에는 열두 시간 통잠을 기록했고 기저귀 뗄 나이가 되어서는 바지에 쉬를 잔뜩 싸고서도 잘 자던 아이다.
이 순한 기질은 어린이집에서도 이어졌다. 줄기차게 때리는 아이에게 대응 한 번 하지 못했다. 주변 어른들이 안타까워 맞서 때리라고 했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원칙을 잘 지키는 편이었으나, 하나에 빠지면 쉽게 움직이지 않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종일 개미를 들여다본다던가, 지나가던 돌멩이에 빠지는 아이였다. 준우는 낯선 환경을 어려워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도적인 성향도 아니었다. 친구 사귀는 걸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깊게 사귀는 친구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2010년생 첫째는 A형이다.
둘째 승우는 첫째와는 기질이 다르다. 임신기간만 하더라도 남편이 창업멤버로 시작한 회사에서 함께 일할 때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태교 할 새가 없었다. 그러다 29주에 조기진통이 왔고, 약 5주간 입원해 있었다. 그 영향인지 성격 강한 아이가 등장했다. 잘 먹지 않고 많이 울었다. 7개월엔 순한 형의 뺨을 후려쳐 옆에 있던 나와 남편을 경악하게 했다. 준우가 놀라 가만있자 웃으며 다시 한번 찰싹! 그제야 나는 달려가서 작은 아기를 안아 올렸다. 당황한 준우는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마치 나같이.
일본 가는 공항에서 승우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가방을 여러 차례 발로 차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도무지 누구를 닮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나도, 남편도 닮지 않아 보였다. 반면에 아이디어는 어찌나 샘솟는지 새로운 놀이를 만들거나 집 여기저기 뒤지기를 좋아한다. 집에서 뭔가 사라지면 이 녀석부터 의심해야 한다. 웃을 때는 참 맛있게 웃는데, 주목받는 자리는 질색한다. 2012년생 둘째는 O형이다.
2016년 미국에서 태어난 막내는 뱃속에서 가장 움직임이 많았던 아이다. ‘고집 참 세네’ 임신 때부터 느꼈다. 내가 옆으로 누워있는 게 본인한테 불편한지 그때마다 뱃속에서 발로 계속 찼다. 자세를 바꿀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막상 태어나서는 처음부터 수면 리듬이 일정해 키우기가 수월했다. 아기 때부터 웃음이 많아 내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 무렵부터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신발도 분명했고, 한 번 “아니야”라고 말하면 고집을 꺾기가 어려웠다.
크면서 이 아이의 성격은 더 선명해졌다. 본인 생일파티는 3개월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며, 10분 단위로 파티를 계획한다. 친구들과 노는 약속도 스스로 잡아오며 여전히 원하는 바가 분명하다. 다소 지시하는 말투가 있다. 오빠들과 달리 배우는데 욕심도 많아 발레, 연극, 배구, 미술 등 자기만의 촘촘한 계획표를 만들어 나에게 들이민다. “엄마는 다 할 수 있어!”라고 웃으면서. 대게 즐거운 편이지만 감정기복이 있어서 갑자기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오빠들에 비해 눈물이 많다.
아들 둘을 키우며 '역시 준우는 나 같은 A형이니까', 혹은 '승우는 O형이니까 이렇구나'라고 단정하곤 했다. 유난히 대하기 힘들었던 둘째를 나와 다른 혈액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승우가 집에서 겉도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O형이니까 그런가 싶었다. 준우가 마트에서 뭐 하나 물어보지도 못하고 내 뒤에 숨으면 A형이라 그런가 보다 싶었고, 승우가 담에 올라가 뒷집 아줌마에게 '나무에 달린 감을 좀 달라'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O형이라 그렇다 여겼다. 무의식적으로 혈액형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있던 셈이다.
하지만 막내 혈액형은 알 수 없었다. 막내를 출산한 미국 병원에서는 출생신고는 해주어도 혈액형은 알려주지 않았다. 태어난 시에 맞춰 사주팔자 따져가며 이름을 지어준 준우나 승우와 달리, 미리부터 Tammy라는 이름이 정해져 있던 아이. 하지만 혈액형은 알 수 없던 아이.
지금까지 가까운 사람 중에 혈액형을 모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혈액형으로 판단하던 그 쓸데없는 근거가 소용이 없어졌다. 태미는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 아이는 모르는 아이가 많은 집단에 들어가면 시간이 조금 필요한 아이구나. 아니 친구를 또 쉽게 만들기도 하네? 욕심이 있는 편이구나. 오늘 보니 리드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있고. 와, 옷매치하는 게 미적인 감각이 있는 아이구나’라고. 틀을 걷어내고 나자 내 아이가 가진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혈액형의 시대가 지났다. 예전에는 세상의 기준 같던 혈액형이, MBTI라는 새로운 기준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마저도 이제는 조금 시들해진 느낌이지만, 국내 도서 사이트에서 ‘MBTI’를 검색해 보면 계속해서 새로운 책이 등장한다. 언젠가는 MBTI마저 구시대적인 기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지 않는 한, 아마도 사람들은 또 다른 카테고리로 성격을 나누려고 할 거다. 나에 대해서,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을 테니까. 복잡한 사람의 성격을 간단한 틀로 정리하면 이해하기가 쉬우니까.
하지만 이런 틀은 때로는 사람을 고정된 성격으로 판단하게 만들 수도 있다. A형이니까 난 소심한 사람이야, 내성적인 건 타고난 거잖아, 원래 그런 걸 어쩌겠어. 그렇게 나를 판단했고, 그 틀에 맞춰 살았다. 두꺼운 유리벽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나에게도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세상이 정한 카테고리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지 못했다.
재작년 한국에 갔을 때 태미가 아파 소아과에 데려갔다. 간 김에 혈액형 검사를 받았다. 궁금해서이기도 했지만 혹시 미국에서 사고라도 나면 혈액형을 미리 알고 있는 게 대처가 빠를 거라 판단해서다. 하루 뒤 받은 결과를 보니 막내 혈액형은 A형이었다. 그것도 RH-A형. 우리 집에서 가장 시끄러운 이 아이는 A형이었다. 나와 성격이 너무 다른 이 아이는 나와 같은 혈액형이었다.
누가 봐도 O형 같았던, 그렇게 O형으로 살아온 3살 위 오빠는 군대에 가서야 A형이라는 진짜 혈액형을 알게 되었고,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A형 같았던 친정 엄마는 76세가 되어서야 AB라는 사실을 알았다. 혈액형은 혈액형 자체로만 생각할 일이다. 혈액형, 그거 믿을 거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