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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하는 육아, 뭐가 어렵다고

by 자몽


나도 직장맘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아침에 아이들을 떼어놓을 때마다, 깜깜해진 다음 친정에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마다, 그리고 졸음을 눌러 참으며 기다리던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가 전업맘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부모님 눈치도 보지 않고, 아이들 보고 싶을 때 마음껏 봐도 되고, 아침마다 닦달해 가며 등원 준비시키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하루쯤 신나게 유치원 땡땡이도 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그 래서 난 전업맘이 되면 잘할 줄 알았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밥 손수 해먹이는 상상을 할 때마다 웃음부터 났다. 많아진 시간 속에 행복만 담을 줄 알았다. 전업맘은 그런 건 줄 단단히 착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탈출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움켜잡았다.




때는 2014년 여름, 남편과 함께 일하던 스타트업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던 회사에 인수되면 서다. 도장을 찍기 전까지 어디에도 말하지 못했다. 미국 회사에서 처음 관심을 보이고, 일이 구체화되고, 실제 도장을 찍던 몇 달이 그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졌다. 제발 틀어지지 않기를, 4년 넘게 쏟아부은 시간이 돈으로 결실을 맺기를, 그리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동시에 퇴사 처리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남편과 일하기 싫었다. 일에 치이는 생활에도 지쳤고, 아이들이나 부모님께 느끼는 죄책감도 멈추기를 바랐다.


무사히 종이에 도장을 찍던 날, 나는 드디어 직장맘 탈출에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모여 사진을 찍고 난 후, 조용히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왔다. 이제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았고 다들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기도 뻘쭘했다. 시원하고도 섭섭한 마음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네이버를 열어 회사 이름을 검색하니 이미 ‘미국에 팔린 한국 회사’로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계약서에는 나의 퇴사도 명시되어 있었지만, 남편 포함 개발 팀장급 네 명이 2년간 미국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남편은 중간에 대표가 되었다). 즉, 다섯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자진해서 퇴사를 하겠다 손들지 않았어도 사실 미국에서 같이 일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영어도 그렇지만 당시 다섯 살 된 첫째와 두 살이었던 둘째를 두고 부부가 또 한 회사에 다닌다는 건 무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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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업맘 생활은 그로부터 1년 뒤에 시작됐다. 남편이 샌프란시스코로 먼저 떠났고, 난 전셋집을 정리한 후 친정으로 들어갔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면서. 남편은 주중엔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일했고, 주말엔 한 시간 떨어진 도시를 돌며 네 식구가 살 단독주택을 알아보러 다녔다. 드디어 적당한 집을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알아서 해주던 남편도, 여전히 막내딸이 애틋한 부모님도 없었다. 아이들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무게가 느껴졌다. 오른쪽에는 다섯 살 첫째가, 왼쪽에는 두 살 둘째가 앉았다. 어릴 때부터 분노를 한 스푼 담고 있던 둘째가 걱정이었는데, 참 얌전히 텔레비전만 보던 기억이 난다. 커다란 헤드폰에 통통한 볼이 눌려 있었다. 아이는 잠도 자지 않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또 봤다.


아들 둘 사이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하지? 사람들 가는 곳으로 따라가면 되겠지. 입국 수속할 때 뭘 물어보려나? 긴장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야지. 주소는 잘 적어놨지 내가? 그다음엔 뭐더라. 짐을 찾아야 하는구나. 시뮬레이션이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 일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영어가 싫긴 했지만 미국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친구도 사귀면 영어가 늘지 않을까 기대도 됐다. 그리고 사실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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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결혼 후 가까이 사시며 많이 도와주셨다. 신혼집은 아빠의 진두지휘 아래 약간의 공사와 도배장판으로 이뻐졌다. 신혼집에 들여놓은 그릇들은 엄마가 예전부터 쓰시던 그릇과 똑같은, 새 거라는 점만 다른 코닝 제품이었다. 여행을 간 사이엔 고단할 딸을 위해 청소를 해놓고 가셨고, 고양시에 살 때는 근처 농장에서 텃밭을 일군다는 핑계로 주말마다 방문하셨다. 첫째는 친정에서 몸을 풀었고, 일을 하게 되면서 아이들은 하루의 반을 친정에서 생활하게 됐다. 저녁도 늘 엄마 집에서 먹었고, 때로는 반찬이나 재료를 공수받았다. 둘째 때는 29주부터 5주간 입원을 하게 되면서 첫째가 친정에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났다.


둘째를 낳고는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님까지 구해서 아이 둘을 맡겨야 했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두 달 정도 친정살이를 했다.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어찌 마음이 편하기만 했을까. 결혼은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은 아니었다. 잠만 따로 잤을 뿐이지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막내딸이었을 뿐이다.


처음엔 꽤 괜찮았다. 미국 주택에 사는 재미도, 의욕도 있었다. 단독주택이라 아이들 보고 뛰지 말라 할 필요도 없었고, 숯불에 고기를 구울 때면 마당에서 자라는 허브를 뜯어 넣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이들은 집 앞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노느라 바빴고, 차도는 까만 도화지가 되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곤 했다. 영어가 무서웠지만 첫째 학교에 가서 매주 발론티어도 했다. 학교에 가는 날은 ‘미세스리’가 되어 선생님을 보조했고, 갈 때마다 첫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하나씩 요리를 완성할 때마다 재미있었다. 남편도 처음엔 일찍 퇴근했고,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천천히 주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주부생활에 꽤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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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를 임신하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였을까. 그래서 함께하는 시간은 많아졌는데 실상 해주는 게 없어 미안해지면서부터 일까. 아니면 갓난쟁이를 데리고 매일 라이드 하는 게 지쳐서였을 수도 있고, 아이가 유난히 껌딱지였던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남편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처럼 일찍 퇴근하고 아이들을 봐주었더라면, 그래서 육아를 나눠서 할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 거다. 그러면 다른 집 아빠들이 집 앞 공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모습을 부러운 모습으로 씁쓸한 표정으로 볼 일은 없었을 텐데. 주변 엄마들이 ‘우리 집 남편은 이걸 안 해.’라며 불만을 터트릴 때마다 속으로 배 아플 일은 없었을 텐데. 비교는 불만의 씨앗이 되어 남편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그것도 아니다. 그가 조금만 나의 수고를 인정하고 다정했더라면, 누군가는 내가 하는 일들이 가치 있는 일이라 말해주었더라면 달랐을까.

아니 애초에 내 성격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하는 성격,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성격,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그 빌어먹을 성격이.


나는 조금씩 웃음을 잃어갔다. 팔딱거리던 에너지가 침몰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아이들이 아니라 주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여전히 자기 커리어를 쌓는 친구들이, 미국에서 아이들 교육도 살림도 만능인 지인들이 부러웠다. 핸드폰의 작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는 아니었다. 매일 똑같이 ‘오늘은 뭐 해 먹지?’만 생각하는 내가 하찮게 느껴졌다. 치워도 돌아서면 더러운 집도, 형제간 우애는 고사하고 늘 싸우는 아이들도 다 내 탓 같았다. 내가 잘못 키워서, ‘고작 집에서 애나 보면서’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래, 나는 살림에도 육아에도 소질이 없었다. 이 또한 적성에 맞는 사람이 따로 있나 보다. 직장맘이었을 때는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이젠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아서 미안해졌다.




이 글을 올리기 위해 옛날 사진첩을 뒤졌다. 마냥 힘들었던 기억만 남았는데, 정작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온통 밝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옆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다. 눈빛에서는 애정이 묻어난다. (지금보다) 어린 엄마는, 아이들을 참 사랑했었나 보다. 함께 있을 때 행복했었나 보다. 그때의 사진들을 보니, 그때가 참 찬란한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늘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부터 좀 덜 미안해져도 되겠다.


타국에서 애 셋을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근데도 나는 아이들에게 뭐가 그리도 미안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편으로부터 “오늘 하루 살아내느라 고생 많았어. 당신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내가 많이 고마워”라는 말을 듣지 못했던 것. 그리고 나만큼이나 고생했을 남편에게 그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던 것. 그거 하나다.


브런치북 공모전에 내기 위해 지금까지 올린 10편으로 우선 첫 번째 브런치북을 만드려고 합니다. (매거진 형태는 응모가 되지 않더군요.) 다음 글은 두 번째 브런치북을 만들어 올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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