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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눈에 비친 나의 이름, ‘할미’.

“할미요.” 그 말 한마디가 남긴 여운

by Dream into Action

최근, 다섯 살 손자 일라이어스(Elias)와 나는 처음으로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엄마 아빠 없이 떠나는 시애틀에서 보스턴으로의 첫 비행기 여행은, 이 어린 소년에게도, 나에게도 신나는 모험이자 조금은 긴장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공항은 언제나처럼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긴장된 표정들, 그리고 늘 그렇듯 무표정한 보안 검색대. 우리는 보안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진지한 얼굴의 TSA 보안요원이 허리를 굽혀 일라이어스에게 물었다.
나를 흘끗 쳐다본 뒤,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여자분은 누구지?”


일라이어스는 긴장한 듯 보였지만,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할미요.”


보안요원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상황을 재확인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엔 살짝 의심이 서렸고,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 순간, 일라이어스는 얼어붙었다.
작은 머릿속에서 톱니바퀴들이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평소엔 말도 빠르고 똑 부러진 아이인데, “할미가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은 그의 언어 체계를 멈추게 한 모양이었다.


일라이어스에게 ‘할미’는 그냥 ‘할미’였다.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 번역도 필요 없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할미'.


정적이 이어졌다.
보안요원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고, 주변의 승객들도 하나둘 우리를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이상한 말만 하지 마라… 제발…”


그리고 마침내, 일라이어스는 어깨를 딱 펴고, 진지한 얼굴로 선언하듯 외쳤다.


“…. Human, 사람이에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떨어뜨릴 뻔했다.
내 머릿속엔 “세상에… 나 사람 맞지!”라는 외침이 메아리쳤다.

보안요원의 굳은 표정도 결국 풀렸다. 그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 다행이네, 사람이라니! 오늘 로봇 감지기 쉬는 날인데, 휴머노이드였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산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듯, 묵직하면서도 시원하게 퍼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승객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완화되자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할미”는 한국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단어라고. 납치범도, 외계인도, 로봇도 아니라고. 이렇게 몇 분의 해프닝과 실소 끝에, 우리는 무사히 보안대를 통과했다.


일라이어스는 아마 ‘할미’와 ‘Grandma’가 같은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그 단순한 번역을 거부했다.
그에게 ‘할미’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오직 나만을 부르는 이름.


그리고 나 역시,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깨달았다.
‘할미’는 단순한 호칭이 아님을.
그건 하나의 유대이자 깊은 사랑의 이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분명히, 인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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