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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가르침의 홍수 속, 작은 여백

by 만숑의 직장생활

“아무리 귀찮더라도 나는 아침 운동을 하루도 빼놓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건 게으름과의 싸움이지.”

순간, 피로가 몰려왔다. 김 부장은 그냥 본인 얘기를 했을 뿐인데, 듣는 순간 나는 게으름과의 싸움에서 진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전 미팅에서 이 차장이 “재테크에 관심 없는 사람은 결국 도태된다”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장면도 떠올랐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흔한 풍경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가르침의 순간’이다. 잡담처럼 시작된 대화가 어느새 교훈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자리가 훈계의 무대로 변한다. 정작 듣고 싶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가르치려는 사람은 늘 넘쳐난다.

문제는 그 말들이 하나같이 틀리지 않다는 데 있다. 정답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정답이 쌓일수록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고, 묘한 피로만 남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가르침이 듣는 이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말하는 이가 자기 확신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왔다”는 말은 금세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로 변하고, 듣는 사람의 맥락은 지워진다. 결국 남는 건 배움이 아니라, 누군가의 확신이 내 자리를 밀고 들어오는 불편한 감각이다.

누군가 보고서에 과정과 의미를 꼼꼼히 담았을 때 돌아온 피드백은 “보고서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해야 해”였다. 설명하려던 의도는 곧장 ‘불필요한 장식’으로 처리됐다. 또 다른 직원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 친절하게 행동했을 때, 선배는 “어차피 다 시절 인연들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라며 핀잔을 줬다. 잘 지내려는 시도조차 관계 관리의 기술로 축소됐다. 틀리지 않은 말들이지만, 정답처럼 굳어지는 순간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남는 건 규칙의 껍데기뿐이었다.

이건 직장만의 일이 아니다. 각종 매체만 켜도 “상사가 좋아하는 보고서 쓰는 법”, “내가 최연소 임원으로 성공한 비결” 같은 문장들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그 말들은 맞는 것처럼 들리지만, 문제는 언제나 듣는 이의 상황을 지워버린다는 데 있다. 어떤 보고서는 상사의 취향이나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어떤 성공은 개인의 선택보다 환경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훈은 이런 복잡함을 덜어낸 채, 오직 화자의 경험만을 정답처럼 남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아침 운동 예찬은 절제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는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선언이다. 보고서 정답론은 효율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는 기준을 아는 사람”이라는 표시다. 이런 말들은 반복될수록 듣는 이를 지치게 한다. 피로는 타인의 확신이 내 자리를 침범할 때 생긴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나도 가끔 그런 말을 한다. 회의가 꼬이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주문을 꺼내고, 후배가 헤매면 “핵심만 정리해”라고 말한다. 그 순간에는 속이 시원하다. 하지만 돌아서면 늘 꺼림칙하다. 그게 진짜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느낌에서 오는 작은 자기만족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 그래서 다음에는 조금 다르게 말해보려 한다. “네 상황에선 뭐가 제일 어렵니?”라는 질문. 확신 대신 맥락을 묻는 말. 느리고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대화는 지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르침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의 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방향감각. 내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 그것은 단정적인 교훈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 속에서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창하지 않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기. 정답을 들려주는 대신 경우의 수를 함께 세워보기. 한 줄 교훈을 던지는 대신 조금 더 길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묻기. 그런 선택들이 쌓이면, 적어도 누군가의 귀는 덜 무겁고 하루는 덜 피로해질 거라고 희망한다.

가르침의 홍수 속에서, 나는 작은 여백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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