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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희(喜)만 있는 사람

by 만숑의 직장생활

회사는 온갖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공존하는 곳이다. 별것 아닌 말에 빈정이 상하고, 사소한 의견 차이로 등을 돌리기도 한다. 금세 가까워져 깔깔대다가도, 하루아침에 냉랭해진다. 울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는 풍경을 보다 보면, 이곳은 마치 거대한 시트콤 세트장 같다.

그 속에서 나는 참 많은 다루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이 지나치게 냉소적인 사람, 늘 반대부터 하고 보는 부정적인 사람,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 세상 중심이 자기뿐인 나르시스트. 나름 한 가닥하는 진상들이지만, 그런 사람들과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대처법이 생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정말 ‘어렵다’고 느끼는 유형의 사람은 따로 있다. 늘 밝고 명랑하고, 웃는 얼굴만 보여주는 사람. 희(喜)만을 내보이는 사람이다.
“그게 뭐가 어렵냐, 좋은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좋아서 어렵다.”


좋은데, 그래서인지 그 사람의 경계선이 더 멀리 느껴진다고나 할까.

우리 팀의 김 차장이 그렇다.

그는 스마트하고 유능하다. 자료를 한 줄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논리는 늘 단단하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빠르게 원인을 찾아내고, 일정이 꼬여도 침착하게 해결책을 세운다. 회의실 안에서 그는 언제나 명료하고 안정감 있다.

그런데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또 다른 얼굴을 한다. 회사 라운지에서는 먼저 장난을 걸고, 점심시간엔 농담으로 모두를 웃긴다. 누군가 실수를 하면 “우리 팀 전통이잖아요. 하루 한 번은 사고 치는 거”라며 분위기를 풀고, 기운이 빠진 동료에게는 슬쩍 농담을 던져 웃음을 끌어낸다.


그의 웃음은 자연스럽고, 말투는 언제나 명랑하고, 태도는 젠틀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김 차장은 참 유쾌한 사람”이라고. 늘 밝고 쾌활하고, 누구와도 무리 없이 어울리는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와 함께 일한 시간 동안 그의 다른 얼굴 ― 노(怒), 애(哀), 락(樂) ― 을 본 적이 없다. 무엇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지, 무엇이 그를 진심으로 흔드는지 감정의 좌표가 보이지 않는다. 겉은 늘 환한 대낮인데, 그 안쪽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희가 넘칠수록, 노와 애, 락의 자취는 사라진다.

감정이란 본래 한쪽만 움직이지 않는다. 기쁨이 있다면 짜증도 있고, 설렘이 있다면 불안도 있다. 노가 있어야 희가 더 선명하고, 애가 있어야 락이 더 깊어진다. 그 굴곡이 드러날 때 사람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아, 저럴 땐 저렇게 느끼는구나.”
우리는 그 좌표를 따라가며 상대를 이해하고, 관계는 그때 비로소 방향을 얻는다.

오히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훨씬 투명하다. 짜증이 나면 표정이 변하고, 실망하면 말수가 줄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얼굴이 어둡다. 그들의 감정선은 거칠지만 읽히고, 예측 가능하다. 희노애락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요란하지만, 그리고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 요란함 속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로의 온도를 느끼게 된다.

김 차장은 다르다.
그의 웃음에서 얼핏 불편한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웃음이 감정의 진폭을 감추는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희의 껍질만 남기고, 노와 애, 락의 굴곡을 매끈하게 지워버리는 것. 그래서 그의 관계는 언제나 부드럽고 매끄럽다. 어떤 순간에도 공기가 무거워지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그의 안쪽까지 닿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이 무엇에 웃는지를 아는 일이 아니라,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지를 아는 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회사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그의 모습이 더 성숙하고, 프로페셔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회사에서 감정의 굴곡을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것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문득 그런 장면들이 떠오른다.
모두가 김치찌개를 먹고 오후 내내 옷에서 찌개 냄새를 풍기고 있을 때에도, 김 차장에게서는 언제나 은은한 꽃 향이 났다. 알고 보니 그는 화장실에서 탈취제를 뿌리고 향수를 다시 뿌리는 습관을 늘 잊지 않았다. 어쩐지 그는 잠시 같은 공기 속에 있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 우리가 함께 서 있었던 자리와는 조금 다른 결의 공간으로, 자연스레 미끄러져 돌아가는 사람.

그래서일까.
나는 그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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