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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나' 대화법, '너' 대화법

by 만숑의 직장생활

점심시간 구내식당.
김치찌개 김이 모락오르고, 사람들은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말은 끊이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이지만, 말이 흐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연다.
"어제 영화 봤는데 너무 재미없더라."
말끝에 여지가 있다. 누군가 이어가길 기다리는 빈칸. 그때 이 과장이 그 빈칸을 곧바로 치고 들어온다.
"나는 지난번에 ‘듄’ 봤거든. 근데 그게 더 별로였어."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 과장의 경험으로 넘어갔고 말을 꺼낸 그 누군가의 어제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다른 누군가가 운동을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꺼내면, 이 과장은 다시 이렇게 낚아챈다.
"아 나도 작년에 PT 받았는데…"
말은 항상 이 과장의 체험으로 되돌아온다.
듣는 사람은 고개는 끄덕이지만 어느 순간 관심이 살짝 멀어진다. 말은 계속되지만, 대화는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 짙어진다.

반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 과장은 다르다.
대화에 들어오면서도 먼저 묻는다.
"영화 재미없었구나. 무슨 영화였는데? 어떤 장면이 특히 별로였는데?"
"운동을 다시 시작하면 뭐부터 하면 좋을까?"

그의 질문은 바탕에 깔리는 밑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말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고, 그 위에 어떤 색을 칠하면 좋을지 가볍게 방향을 잡아준다. 질문이 붓질의 첫 스트로크를 대신해주면서, 상대의 생각이 선명해질 수 있도록 틀을 잡아주는 셈이다.

그래서 박 과장과의 대화는 편안하게 길어진다. 말이 막혀도 억지로 이어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질문이 이미 배경을 깔아두었으니까. 나는 그 위에 내 경험, 생각, 느낌을 천천히 올리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박과장이 자기 이야기를 살짝 얹는다. 과하지 않게, 필요한 만큼만.

누가 더 많이 알고, 더 말을 많이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화가 끝난 뒤 남는 건 단 한 가지 — 우리가 한 장의 그림을 함께 완성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이 과장과 박 과장의 대화법을 굳이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부른다

누가 말하면 곧바로 자기 경험을 꺼내 대화의 중심에 올려두는 사람 — 나 대화법.
상대의 말을 한 번 더 듣고, 그 위에 조심스레 자기 생각을 얹는 사람 — 너 대화법.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두 스타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회의에서 자료 설명이 이어지다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우리 작년에 이런 문제로 고생했잖아요."
그러면 어떤 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일화를 꺼낸다. 그때 저랬고, 이랬고, 나름의 해법도 있었다고. 하지만 회의실 공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경험은 많았지만, 말들은 서로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반대로 의견이 다른 순간에도 누군가는 묻는다.
"당시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는지 궁금해요."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방향을 바꾼다.
정보가 모이고,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함께 쌓이는 이야기. 어느새 회의록에 남는 문장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우리의 합의’가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말이 흐르는 방향은 내용보다 분위기를 먼저 만든다. ‘나’로 응고된 대화는 빠르고 선명하지만 금세 굳어버리고, ‘너’로 풀어낸 대화는 느리고 번거롭지만 여럿의 생각이 천천히 흐른다.

구내 식당 문을 나서면서 오늘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오늘 나는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 누군가의 말을 내 이야기로 덮진 않았는지, 아니면 다음 생각으로 건너갈 다리를 놓아주었는지.

'나'로 응고됐을지, '너'로 흘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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