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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Mar 17. 2024

번외 - 어느 봄날

2024.03.08. 화

<어느 봄날>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금요일.

날씨는 그 손마저 꽁꽁 얼린다.

2교시와 3교시 연속으로 자유학기제 체육활동, 방송 댄스 1반으로 들어가야 한다.

머리에 눈이 수북이 쌓인 할아버지를 보고 아이들은 자꾸 내 뒤를 본다.

TV에서 보는 멋진 사람이 오겠지, 하는 기대를 했나 보다.

여학생 26명, 남학생 4명.     

안전교육을 TV 화면으로 보여준다고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악기를 하나도 다룰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춤을 배우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기어이 악기 하나쯤은 배울 참입니다.”

공부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을 것 같다는 말에 끄떡여지는 고개들이 여럿이다.     

준비 안 된 말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일 어렵다.

옆 반을 내다보니 TV에서 교육이 한창이다.

선생님을 귀찮게 해서 결국 1시간을 마무리한다.

모를 때는 체면이고 염치고 뒤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우르르 복도로 나간다.

웅 웅, 벌 떼 우는 소리를 들으며 벌통 옆에 서 있는 신세다. 


바지락처럼 반질반질하고 개나리꽃같이 통통 튀는 아이가 내 앞으로 온다.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선생님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응 뭔데?”

심각한 척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춘다.

“제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옆 반에 있거든요.

근데 내 친구가 그 옆에 앉아있단 말이에요.”

“안 됐네, 그럼 어떡하냐?”

“더 슬픈 일이 있어요?

그 아이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마침 시작종이 울리고 꽃은 제 밭으로 간다.

참 너희들은 좋은 세상에 사는구나.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니 말이다.

맹랑한 녀석이다 싶으면서 또 부럽다.  

   

원하는 동영상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노트북 조작을 할 수가 없다.

잘하는 녀석을 찾았지만 나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음악만 듣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DJ가 나오고, 희망하는 음악을 튼다.

무슨 가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쿵쿵 울리는 리듬이 가슴을 때린다.

아이들은 앉아서도 똑같이 머리로 손으로 몸통으로 잘도 따라 한다.

자식들은 눈치를 못 챘겠지만, 옷 속에서 내 다리도 떨고 있다.     

슬프다는 아까 그 녀석이 손을 든다.

살금살금 다가가 귀를 내미니

“심심하지 않으세요? 따라 해 보세요.”

양손을 머리부터 S자를 그리며 눈으로는 나를 재촉하고 있다.

참 종잡을 수 없는 아이다.


뒷자리로 돌아와 생각 또 생각해도 퐁퐁 뛰는 럭비공 같은 아이다.     

앞자리 아이와 스티커에 그림을 그리고 웃고 있다.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묻는다.

“몇 반이야, 번호는?”

검은 안경테 너머로 눈이 반짝이더니 흰 바둑알 같은 이가 다 보이도록 웃는다.

“1반 12번인데요, 제가 인기 엄청나게 많게 생기지 않았어요?

앞으로 보면 꼭 아는 체해야 해요.”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재간이 없다.  

    

햇살길을 두 줄로 꽉 메운 개나리가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

말릴 틈도 없이 바쁘게 피워버렸다.

36년 동안 살았던 남쪽 나라 따뜻한 학교로 막 달려가고 있다.

그곳의 아이들은 열심히 공을 따라 뛰고 있겠지.

등이 가렵다.

나도 목련처럼 피어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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