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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Aug 10. 2024

큰일났다

2024.06.21. 금

<큰일났다>     


역대급 밤더위다.

선풍기를 틀고 맨바닥에 몸을 부린다.

푸짐한 베개 때문에 뼈가 고이지는 않는다.

뒤척이는 것은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짧지만 특별한 경험, 아이들이 어른거려 잠까지는 가지 못한다.    

 

첫날 보았던 옹벽의 꽃은 아랫도리가 다 말랐어도 아직 씩씩하다.

초등학교 담에 재잘거리던 포도알들이 통통하니 고학년이 되었다.

수리산의 표정을 보고 날씨를 가늠하며 전철을 기다린 2주. 

스치는 풍경만을 보고도 역을 가늠할 수 있다.

냇가 건너편 빨래하는 누나의 손등을 간질여 줄 만큼 자그마한 물살이었겠지.

나의 흔적은 물살 사라지듯 잠잠해질 것이다.     

항상 밝고 자신감 넘치는 아이, 천재성이 보이는 그 아이에게 계속해서 다른 아이들을 잘 챙겨주고 즐겁게 생활할 것을 고마운 마음과 함께 보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열심히 들어준 카자흐 천사에게도 새 환경 새 사람 새 말을 배우느라 고생한다며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고.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모범 소녀에게도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칸의 후예에게는 계속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기를.

목이 두꺼운 장사에게는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엽서를 쓴다.    

 

앞의 여선생님은 전화로 노트북 지원 사업이 있으니 신청해 보시라는 애원을 계속한다.

이제는 형편이 좀 나아져 신청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절.

살 만큼 살게 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계속되는 사정의 목소리가 애처롭다. 

    

도서관 사서 샘께 시집을 반납한다.

이제 못 보게 되는 건가요?

정해진 곳은?

찾는 곳이 있으면 가야지요.

기회가 되면 또 봬요.

제가 나이가 많아 아무래도 기회가 적을 것 같다는 누님.

우리 파이팅 해요.     

유난히 민감한 장 때문에 여름이면 고생 고생 생고생했는데.

깔끔한 내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원한 물줄기로 내 어려운 부분을 지켜준 맞춤 변기도 안녕.     


마지막 활용 문제를 풀고 지금까지 배운 일차방정식 내용까지 정리해 주었다. 예쁜이 2반.

문제지를 나누어주니 수현이는 빨리 책상 줄을 벌리란다.

번개처럼 달리는 연필.

14명 중 네 명만 열심이다.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시험지를 바라본다.

미안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

땅이 꺼져라, 제 나라까지 갈 것 같은 한숨을 쉬는 아이.

이 아이들에게도 내 말들이 의미 없지는 않았기를.     

한없이 맑은 눈빛들.

시건방 떠는 아이 하나 없었다는 것도.

젓 달라는 아이들처럼 애처로운 갈구.

길 영자 클 태자 선생님이라고 따라다녀 주었던 아이들.

산책길에서 만난 털 많은 강아지처럼 올려다보던 그 선한 아이들.

또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나의 은퇴 후의 삶이다.   

  

교장 선생님께 그동안 즐겁게 생활했다며 작별 인사를 드린다.

점심을 먹고 나온 아이 중 다섯 아이에게는 엽서를 전달한다.

아마 한국말로 써진 첫 번째 자그마한 편지가 아닐까?

아직 한국말을 잘 읽지 못한 사피라는 선생님께 엽서를 보여드렸던지,

“아니, 저희도 못 한 일을 2주 있다 가신 선생님이 해주셨네요.

빨리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이건 원하던 그림이 아닌데.

교감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아니, 다음 주 화요일까지 나오셔야 하는데요.

교무부장님의 연가가 화요일까지입니다.”

이것은 무슨 시추에이션.

분명 계약서를 썼는데, 2주라는 소개한 선생님의 말을 듣고 확인해 보지 못했다.

아이들과 작별 인사까지 했겠다.

짐까지 다 쌌는데.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수업은 끝났으니 짐을 챙겨 일단 나온다.

“주말 잘 보내세요.”

등 뒤로 달려오는 연구부장님의 외침.

“참 털털한 분이다.” 하겠지.

아니 실없다 할 거야.


오후 1시를 넘어가는 도로에서는 열기가 고래 물 뿜어내듯 튀어 오른다.

냉장고에 컵을 넣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따르는 재미로 사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네.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나가야 한다는데.

좋아? 싫어?     

교무실로 오른 계단 제일 아래부터 싸진 문구.

‘포기하지 말라, 모퉁이만 돌면 희망이란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나는 때이다.’

‘성공은 수고의 대가라는 것을 기억하라.’     

일단 주말은 푹 쉬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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