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토스트와 그림

전시 합니다

by 노사임당

두툼하게 부쳐 만든 토스트 모서리만을 남겨둔 채 일어섰다. 양배추를 넉넉하게 썰어 넣고 만들었으니 양이 많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빵 모서리는 언제나 남기는 버릇이 내겐 있다.


햄토스트, 달걀 토스트, 두배치즈토스트. 이름이 무엇이든, 들어가는 재료가 무엇이든 변수는 아니었다. 맛있게 먹다가도 마지막 한 입, 빵만 남은 부분은 왠지 먹지를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빵만 입에 넣으면 무언가 손해라도 보는 기분이 들곤 해서였다. 보통이면 반도 다 먹지 못할 양을 배부르다는 기분도 느끼지 않고, 겨우 다 먹었다는 안도감도 느끼지 못하며 먹었다. 그러니 그 마지막 조각쯤이야 배가 불러서 도저히…. 라며 남긴 건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도 굶고 1시나 되어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잠을 많이 자긴 하지만 최근에는(일을 많이 벌여서) 그러지 못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변명'을 하자면, 먹지 말라던 커피를 마시고 오랜만에 카페인 덕까지 보면서 잠을 설쳐서다. 근 4년. 커피를 한 모금씩 늘려서 겨우 대용량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수 있는 몸을 만들었는데 아프면서(신장 결석) 절커(커피 금지)중이었더니 열흘 만에 다시 제자리에 가까워졌다. 물론 다시 마신다면 빠르게 양이 늘겠지만 말이다.


빵을 좋아하면서도 토스트에 든 빵은 도구처럼 느낄 때가 있다. 토스트를 먹기 위해, 토스트라는 모양의 음식을 구성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재공품처럼 말이다. 밥을 네모나게 부쳐 갖가지 채소와 햄을 넣어 본들 그게 토스트처럼은 보이지 않을 성싶으니까. 토스트를 토스트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속에 든 재료보다는 네모난 식빵, 그것 때문이다. 그러니 빵을 좋아해도 내용물을 다 먹고 끝부분에 빵만 남을 때는 갈비뼈를 버리듯이 자연스럽게 내려놓는다. 토스트가 토스트로 보이게 해 주는 빵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속은 다 먹었으니 더 이상 남은 음식이 토스트일 필요도 없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쓸모없어졌다 싶었다.



가끔 그림이 버거울 때가 있다. 소셜네트워크에 올라오는 유명하고 대단한 그림쟁이들의 그림을 보면서(잘 그리고 유명하니 구독하게 되었으면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그릴 수는 없을 거라며 어깨를 늘어뜨리곤 한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을 오롯이 쏟고, 노력했는지는 보지 못한 채, 절망도 해가며 이루어낸 지금의 그림 세계를 단 한 번의 구경으로 부러워하고 질투를 하곤 했다.


물론 그 질투는 나를 성장시키고 도전 정신을 깨우기도 한다. '조금 더 노력해야지'라는 의식을 키워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그린 그림이란,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잘 그려야 한다는 전제를 낳는다. 비교와 타인의 눈이라는 절대적 선을 설정하게 한다. 그림을 잘 그려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져야지'와 같은 생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림을 왜 그리는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게 되었나를 생각해 본다. 소녀 적부터 꿈꿔온 그림 그리는 작업, 무언가를 끼적거리며 안심하던 내 손. 전시관의 아름다운 그림을 본 후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이 다가오던 그런 감동들.

그림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과 풍성한 감정을 사랑하니까. 지겹도록 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타인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볼 기회가 생기니까. 내가 그린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우주에 매료되니까. 창조자 혹은 창작자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주는 내적 충만감과 포만감을 얻게 되니까. 나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겨우 그림 한 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종이비행기를 접으며. 지점토로 사람 모양 인형을 빚으며. 연필로 만화 캐릭터를 그리며. 어린 시절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수많은 창조로 이루어졌었다. 그러해야만 하는 사람이 어른이 되면 쓸데없는 짓이라는, 효율성과 경제성 논리에 따라 가끔 <자식을 만드는 일>에서나 겨우 완벽한 창조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허무와 우울은 무언가 무해하고 무용한 듯 보이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며 흐리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그럴듯한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글자든, 그림이어도.


종이에 번지는 색들의 미묘한 변화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하늘이 만들어질 때마저도, 시시각각 모양과 색을 바꾸는 자연을 바라보듯 느껴진다. 그러한 경이를 내 손으로 만들어낼 때의 쾌감. 그걸 사랑하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잘 그렸으니 즐거웠고 잘 못 그렸으니 불행하지 않다. 아무런 상념도 없이 선을 긋고 붓에 물감을 묻히며 순간에 충실해진다.


그림을 토스트를 먹기 위한 도구로써의 빵처럼 생각할 때가 있었다. 유명해지기 위해, SNS에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 올려야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느껴지는 그림과 나만 세상에 남았다는 친밀감과 끈끈함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매개물로 이용하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림이 순간의 몰입을 선물한다면, 붓을 씻고 스케치북을 덮으며 찾아오는 공허의 기운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변명으로 무언가와의 연결을 찾기도 했다.


휴대전화 앱을 켠다. 조금 전 그림과 나누었던 친밀했던 집중의 시간을 재현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림과 순수했던 시간을 금방 잊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아이가 자라서 제 손으로 컸다는 소리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자라며 보여준 웃음 한 번과 따스한 포옹으로 -갚아야 할 것이 있었다면- 빚은 자동 소멸하듯이 순간의 몰입만으로 그림의 할 일은 끝난다. 붓을 놓으며 그림에 실망할 때가 있다. 순간의 몰입과 행복을 잊고 결과물로, 결론만을 바라고 무언가 한 것처럼 눈빛을 바꾸기도 한다.


아니, 쓸데없는 데 시간과 돈을 쓴다는 자책이 고개를 드는 까닭이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부를 가지는 것이 인생을 더 잘 살았다는 성적표로 인식되니까.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 분야에 시간을 들이고 본업을 소홀히 한다는 불안이 가끔 라면 국물 넘치듯 튀어 오르니까.


토스트 내용물을 감싸는 포장용으로써의 빵이라니. 식빵은 그 자체로 토스트의 일부이자 토스트 그 자체다. 그림은 그림으로써 내게 행복을 주는 목적이지 그것으로 어떠한 일을 도모하려 해선 안 된다. 그림은 그림으로 내게 할 일을 다 했으니까. 그것으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 이룬 것이니까. 비교도 자책도 필요 없이. 내용물을 다 먹었으니 버려야겠다는 생각 없이. 토스트의 빵처럼 그림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그것들에 집중해야겠다. 창조자의 권능을 맛보러. 아름다움을 만나러. 그리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의령 도서관 전시하려고 그림을 풀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요. 근데, 도서관 공사를 하는 바람에.... 대충 넣어놓고 왔어요. 도서관에서도 배너랑 안내장이랑 걸지도 못했다네요. 도서관을 비닐로 다 덮고 공사.. 4일부터는 제대로 전시가 될 것 같아요. 저도 오는 목요일에 다시 가서 그림 제자리 찾아주려고요^^

그때 다시 사진 찍어 올리겠습니다. (이번 전시는 의령 골목 산책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