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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안 먹어요

못 먹는다고요

by 노사임당

가리는 건 딱히 없다.




주는 대로 먹고 있는 대로 먹는 편이다. 그렇다고 식성이 좋은 건 아니다. 먹을 걸 앞에 두고 그 음식이 기분 나쁘지 않게 기꺼이 먹는 것도 아니다. 술을 대하는 자세 같달까. 소주 한 병 반이 주량이지만 보통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 특별한 날에도. 맛이 없어서다. 직장 다닐 때는 술 상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내 기준에서) 자주 마셨다. 술 따라 다르지 않겠냐 싶겠지만, 맥주는 더 싫다. 과일을 싫어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너무 차갑다. 3년에 한 번 정도는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은 날도 있다. 그래서 남편이 사놓은 맥주를 그릇 건조대 뒤에 숨겨놓고(?) 마신다. (너무 목마르고 더운 어느 여름날) 과일도 가끔은 먹는다.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으니까.


매운 걸 잘 먹는 편이다. 하지만 먹기 싫다. 화가 난다. 술을 먹어도 그렇다. 화가 난다. 기분이 나쁘다. 술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그 느낌이 너무 싫다. 내 혈관을 느끼는 그 기분은 좀 섬뜩하다. 고춧가루가 내 위에서 소화되지 못한 채 떠도는 그 느낌도 싫다. 고춧가루 불내증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매운 건 잘 먹는다, 있을 때는. 기쁜 표정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자리에서나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취향이 제법 확실하다. 몸이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취향 없는 척 무해한 척 굴어봐도 내 속까지 속일 수는 없다. 까다롭지 않은 척, 어느 무리에나 끼일 수 있는 포용적인 인간인 척하지만 갈수록 그런 연기는 멀어진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살아보았지만 살수록 느낀다. 나는 꽤 취향이 있다고. 꽤 까다로운 인간이라고. 미운털 박히지 않으려 아닌척하며 살았지만, 인간과의 관계를 정성껏 하지 않으니 예의상 아닌 것도 긴척할 사이가 없다, 거의. 이렇게 내 삶을 몰아온 것 같다. 싫은 걸 싫다고 할 용기가 없으니 싫은 걸 좋은 척해야 할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 멀리하는 것으로 말이다.



도서관에 간다. 남들에게 유명하다는 책을 집어 든다. 머리가 좋아질 것처럼 생긴 이과적인 책, 지적 대화를 위해 우아함을 1점 정도 올려줄 인문학 책,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인답게 내 조상의 일기 같은 역사서까지…. 읽어야 할 것도 많고 읽으라는 책도 많다. 이건 좀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 책도 있다.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고 이런 감동을 받았다던데. 요즘은 과학을 이렇게 받아들인다던데. 인문학은 대세를 넘어 일상이 되었지. 이런저런 책을 잔뜩 빌린다.


오늘은 진짜 한 권만 빌려야지 다짐에 다짐하고 가지만 대부분은 화장실 단골 대사만 읊는다. 들어갈 때 마음과 다르고 나을 때 마음과 다르다. 중요한 건 들어갈 때 마음이 집에 갔을 때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홈쇼핑 호스트들의 말재간 같은 화려한 책등에, 제목에, 소개 글에 속아 어깨 무겁게 책을 싸 짊어지고 와 본들 결국 다시 짊어지고 갈 뿐이다. 1개 가격에 세 개! 무려 네 개. 이럴 수가 다섯 개. 집에서도 입기 싫은 색깔 옷 하나와 꺼려지는 색 하나와 좋아하는 검은색(?) 하나가 들어있는 홈쇼핑 옷들. 내 인생 같다. 본질보다 곁다리에 욕심을 내다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상처도 입는다, 내 한심한 결정에.


요즘은.

매운 거 안 먹어요. 술 안 먹어요.

까다로운 사람이라 생각해서 나랑 놀아주지 않으면 어쩌냐고 하는 내 속의 아이를 다독이며 말을 뱉는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만나자는 사람도 없는데 겨우 만나준 사람에게 나 이런 사람이오, 나 이런 거 싫으오. 하며 까탈을 부려 그에게 어려운 사람이란 이름표를 달고 싶지는 않다. 물론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면 대충 그날을 넘기려 그런 말을 하긴 한다. 근데 중요한 건 오래 만날 사람에게 나를 보여주는 노력이 아닌가. 싫을지 모르지만 이게 나라고. 아니, 나는 그게 안 맞아. 그리고 맞지 않는 음식을 먹지 않을 자유 정도는 있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문체를 가진 에세이를 발견하면 금맥을 발견한 것 같다. 1년에 몇백 권, 몇천 권 읽는 사람들에 비하면 책을 베개로나 쓰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한다. 사랑했던 적도 있다. 첫 키스를 떠올리며 무릎이 꺾였던 다음 날의 기억처럼 도서관에 들어서며 심장이 내려앉고 무릎이 꺾이던 경험이 얼마나 많았던가(언제 다 읽지? 였나?). 돈도 없으면서 책방에서 얼마나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했던가.


비가 온다. 안개비다. 속도전이 아닌 물방울. 땅으로 내리꽂히는 물들이 아니라 지상을 떠돈다. 유영하는 물방울들. 비 오는 날이 좋다. 비가, 도로를 깔던 일손도 멈추어 세운다. 건물이 올라가는 속도를 하루쯤 늦춘다. 느려지는 세상이 좋다. 비가 오면 바짝 말릴 빨래와 눅눅해지기 전에 걷어야 하는 호들갑이 없다.


목적도 없이 읽는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배워야 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지적 호기심도 아니다. 그저 허영에 가깝지. 나는 관심도 없는 분야의 책을 빌려와서는 제목도 삼키지 못한 채 도로 뱉는다, 자주. 이런 행동, 하고 싶지 않다. 노력이라고 보려고? 아니다, 그건. 희열도 없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노력을 하였노라 자위하고 싶지도 않다.



상관없다. 이젠 내 멋대로 살란다. 눈치 없이 굴면 비난하던 엄마로부터 독립도 했겠다. 까짓것. 뭐. 누가 뭐랄 꺼야. 그래서 내가 싫다고? 내버려둘 거다. 느린 나로 살 생각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속도만큼. 내가 글을 쓰는 속도만큼으로만. 세상을 받아들이는 속도만큼만. 누군가를 동경하며 부러워하기에는 살아온 날들이 조금 쌓였다. 헛발질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가능성보다는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자기 무능감(?)이나 맛본 가능성이 크다. 살다 보니 주제 파악은 제법 한다. 나를 알아야 내가 받아들이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이라는 것도 내가 받아들이는 만큼 존재하는 거니까. 일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남기며 책을 쓰고 강연도 하며 이러저러 한 활동을 하고 존경받는 것과 내가 내 삶을 사는 것은 비교 대상도 아니고 따라가야 할 길도 아니다.


비가 온다. 세상엔 맑은 날만 있지 않다.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평범한 사람은 더 많다. 그뿐 아니라 많아야 한다. 평범하기에 필요한 일이 있다. 이 무거운 세상을 받쳐야 한다. 앞서가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모른다. 평범하기에 느끼는 지구의 무게를. 그걸 감당하며 사는 나도 꽤 힘들다. 뒤통수만 보며 걷는 삶도 길도 아닌 곳을 걷는 그들보다 쉽지 않다. 모두가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세상은 저울 같지 않다. 비교로만 무게를 재는 건 아니다.


오늘도 내 속도로 하루를 살아냈나?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게으르고 몽상적인 하루를 보냈으리라. 남들과 비교하자면 보잘것없는 그런 하루. 돈도 벌고 애도 키우고 책도 내고 마라톤도 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강연도 하고 뭐 그렇게 사는 분들도 있겠지. 그럼에도 나는 내 속도에 맞는 글을 하나 낳아 놓았으니 느린 하루에 내 일 하나는 했구나 싶다. 내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 없는 거니까. 지구 속도로 보자면 하루에 몇 번씩 도는 어린 왕자가 여행한 별 같다. 어느 별에 사는 어떤 누구는 하루에 많은 일을 해 냈다면, 나는 며칠에 글 한편 내어놓고 그림 하나 내어놓으며 살고 있다.


내 세상은 오늘도 내 속도로 잘 굴러갔다. 게다가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다. 거저 생긴 시간까지 있다. 부럽지? 훌륭한 분들아? (죄송합니다. 재수없이 까불어서)


(약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약간 무기력이랄까요. 왠지 실패자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요. 그래서 좀 글이 재수 없습니다. 기운 내자는 의미이니 고깝게 보지 마시고^^)


의령도서관 전시가 이틀 남았습니다. 제 속도와 비슷하게 계절이 바뀌고 오리는 물고기를 잡고 하루를 살아냅니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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