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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용 Oct 26. 2024

《도시의 체온。》

한때, 방송국 PD를 꿈꿨던 소설가의 상상.

[새벽 5시 23분, 경기도 어느 아파트]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빛 하나가 어둠을 가른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창 너머, 주방에 선 어머니의 실루엣이 움직인다. 밥솥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김이 창문을 뿌옇게 물들인다. 도마 위에서 당근이 잘리는 소리, 계란 프라이가 지글거리는 소리, 반찬통 뚜껑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운다. 식탁 위로 도시락 반찬들이 색색이 자리 잡아가는 동안, 멀리서 첫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울린다.

[아침 7시 15분, 동네 골목길]

"영민아, 마스크! 또 깜빡했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골목을 깨운다. 책가방을 멘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아침 공기를 타고 퍼진다. 교복 재킷 단추를 채우며 뛰어가는 중학생, 체육복 가방을 질질 끄는 고등학생, 막 세수를 끝낸 듯 물기 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까지. 골목은 이미 하루를 시작했다.

골목 어귀 분식집 앞으로 매콤 달콤한 떡볶이 냄새가 피어오른다. 아주머니는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 양은솥 안의 떡을 젓는다. 튀김기름 속으로 고구마가 하나둘 빠져든다. "오늘은 일찍 오니? 더 맛있게 해 줄게."

[오후 2시 45분, 재래시장]

"이 고등어, 눈이 아직도 반짝반짝해요!" 생선가게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시장 골목을 울린다. 비늘이 번쩍이는 고등어 위로 얼음물이 흩뿌려진다. 3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반찬가게 할머니는 김치 통을 들여다보며 맛을 본다. 주름진 손가락으로 소금 간을 맞추는 그 손끝에서 시장의 역사가 이어진다.

"이 상추는 방금 들어온 거예요. 비 맞은 채소라 더 싱싱해." 채소 좌판 앞에선 주부들의 흥정이 한창이다. 장바구니에 담기는 채소마다 저녁식탁의 이야기가 담긴다.

[저녁 6시 30분, 지하철역 앞]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토해낸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를 두드리는 소리, 휴대폰 알림음, 한숨 소리가 뒤섞인다. 검은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 사이로 하늘색 간호사 유니폼, 형광색 조끼를 입은 택배기사, 흙먼지 묻은 작업복이 섞여 있다.

역 앞 포장마차의 붉은 전구가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버너 위에서 어묵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녹슨 테이블 위로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주도 고생 많았어."

길 건너편 고층 빌딩 외벽의 LED 전광판이 도시의 어둠을 밝힌다. '살고 싶은 도시', '머물고 싶은 동네'. 반짝이는 그 문구들이 마치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밤 9시 12분, 동네 곳곳]

포차의 붉은 천막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라면을 후루룩 들이키는 고등학생들, 삼각김밥을 한 손에 든 채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청년의 발걸음 소리. 골목길 가게들의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수놓는다.

[자정, 도시 전경]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깜빡인다. 병원 응급실의 형광등, 편의점의 하얀 불빛, 택시 미터기의 붉은 숫자들. 한밤중에도 도시의 심장은 뛰고 있다. 술집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늦은 배달의 오토바이 소리, 마지막 버스의 엔진 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어딘가에서 새벽을 준비하는 어머니가 일어날 시간이 다가온다.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그저 숨을 고르며 다음 날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런 언어가 필요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거리'
'시간이 쌓이는 골목'
'이야기가 숨 쉬는 동네'
'추억이 무르익는 마을'

매일 같은 하늘 아래, 우리는 각자의 드라마를 살아간다. 새벽 출근길의 발걸음 소리부터 늦은 밤 귀가하는 발자국 소리까지, 이 모든 순간이 도시의 일기가 된다. 우리는 이미 이곳의 살아있는 체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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