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 창문을 두드리는 햇빛은 유난히 밝았다. 내가 운이 좋은 탓일까, 매번 날씨는 나의 감정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영향이 있다. 그제야 묵혀있던 숨이 트이고 일상으로 복귀할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조금 천천히 그러나 머릿속 정리는 빠르게 해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아있던 외주를 처리해야만 한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이제는 에너지를 적당히 분배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챙겨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도약을 위해 그나마라도 나를 반기는 그것이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언정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나의 문자에도 업체 담당자들은 비록 '작가'라 부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 속이 편한 것처럼 그저 그런 자연스러운 현상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감은 다가오고 있었기에 서둘러 노트북을 열고 또다시 이미지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열어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 작업은 모션그래픽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시작하기 전 누군가 작업을 했지만, 그 작업자가 갑자기 잠수를 타는 바람에 데드라인이 4일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서 전달된 아주 미스터리 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그동안의 내가 했던 모든 업체 중에 가장 큰 업체였기에 나는 그 데드라인 마저 감당하며 작업을 해야만 했다. 담당자는 연실 전화를 걸어 '완성이 얼마나 됐나요?'라며 셀 수 없이 물었고, 그제야 나는 그전 작업자가 왜 잠수를 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1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걸면 상당히 지치는데 돈을 준 입장에서야 그것을 이해할 순 있지만 너무 잦은 연락이 작업을 망치는 일임을 인지하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평소대로 차분하게 응대하며 날짜에 전혀 지장이 없으니 인제 그만 연락을 주셔도 된다며 안심시켰지만, 내 손은 빛과 같이 빨리 움직였다. 분명 나는 MBTI가 INTP임에도 업체를 대할 때만큼은 f로 변해 상대를 이해하고 고려하는 나름대로 응대가 괜찮은 편에 속하는 작업자였기에 많은 업체들이 나의 응대를 만족했고, 이번 담당자 역시 나의 응대에 만족한 모양인지 1시간에 한 번 전화하던 것을 멈추고 3시간에 한 번 전화했다. 이틀 삼일이 지나니 이젠 전화가 기다려지는 미스터리 한 현상이 일어났고, '아 이제 전화 올 때가 됐는데.'라고 생각하면 5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윽고 나는 4일의 시간 따윈 필요 없이 3일 만에 작업을 완성했다. 이번 작업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을 무렵, 엄청난 양의 수정 요청을 해왔다. 다음날까지임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서둘러 하나둘 다시 수정하며 수정이 될 때마다 완성본을 보냈지만 결국 당일 오전까지 수정을 총 20차례 정도 했다. 결국 업체 담당자님은 그제야 안도하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 모바일 상품권을 보내줬다. 그럼과 동시에 처음 약속한 비용도 지불하셨고,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이상하게 외주 즉 남의 일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힘을 전부 쓰는 버릇이 있다. 돈이 나를 움직이는 것인가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큰돈을 받지 않을 때도 나는 무슨 기계처럼 움직이며, 일상생활의 루틴까지 바꾸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쓰지만 그 결과 업체의 인정을 받을 때면 잊고 있던 인정 욕이 채워지는 느낌에 희열을 느끼곤 했다.
외주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면 꼭 나는 오랜 시간 걷는 것을 즐긴다. 걷는 것은 내가 아는 행위 중 나를 가장 차분히 만들어주고 잡생각들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그것을 지속해서 하다 보면 성취감까지 따른다. 이날 저녁도 몹시 추운 날의 겨울이었지만 한강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고, 걸음걸음 속 내 스트레스와 잡생각들을 담아 보냈지만, 세상은 넓은 아량으로 내 한탄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주었다. 어느덧 일렁이는 물결에 빛이 반사된 모습을 보며 한숨과 함께 모든 것을 털어 던졌다. 물의 소리와 야경, 그 모든 것은 나를 위로하며 잔잔함에 품어주었고, 동시에 요동쳤던 모든 것들을 다시금 잔잔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감정을 자연, 인공물과 나누다 보니 인정할 것들에 인정을, 변화된 것들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억지로 해오던 외주 일을 사랑하게 되는 진정한 프리랜서로 전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