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벗어나 시작한 프리랜서의 생활엔 많은 공부가 필요했으며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좋아진 것이라곤 거의 말하는 기술이었다. 업체의 요청에 합당한 작업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는 많은 용어들을 익히기 시작했고, 비슷한 결의 작업을 하곤 있었지만 다소 전문 지식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영상편집, 콘텐츠 제작 등 관련된 내용을 만들어야 할 때면 내가 아는 지식을 정확히 전달해야 업체가 이해하고 그것이 제작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기에 많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용어와 내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역시 벼락치기가 가장 잘 이해되듯이 갑자기 시작한 공부는 하나하나 금방 익혀 업무에서 써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외주 일은 이상하리만큼 끊임없이 발생했고, 공부로 얻은 지식을 활용하니 일을 구하는 것은 다소 쉽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구할 수 있었다. 대게는 작은 규모의 회사들의 홍보용 포스터 혹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많이 했지만, 그 사이사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규모의 회사들과 일을 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예술을 할 때 항상 협업으로 큰 회사들과 일하는 것을 꿈꿨지만 쉽지 않았는데 외주로는 그런 큰 업체와의 일들이 신기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원할 때는 되지 않던 일이 가만히 있어도 생긴다는 느낌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일들은 나를 프리랜서 세계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바쁜 일상들은 자연스레 나의 일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돌아갔다. 프리랜서로서 만족과 성취를 느끼는 순간은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의 커튼콜과 비슷했다. 업체들 혹은 담당자들이 나에게 마무리 인사로 '고생하셨습니다.' 혹은 '너무 감사합니다.' 등 여러 가지 감사의 인사를 보낼 때 작은 희열이 있었다. 비록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은 아니지만 감사의 인사와 점점 늘어가는 계약이 완료된 계약서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일로 가득 찬 하루의 끝엔 다소 공허함과 한쪽 벽면으로 자리를 옮긴 캔버스와 점점 어딘지 모를 수납장으로 향해진 물감들은 아쉬움을 내비치는 것 같았지만 현실의 벽 앞에 선 나는 그들을 바라만 볼 뿐 할 수 있는 게 당장은 없었다. 중간중간 상태를 체크하려 물감의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잘 굳지 않는 유화물감과는 달리 계속해서 굳어가는 아크릴 물감을 바라볼 때면 나의 작업 의욕도 물감처럼 굳어지진 않을지 작은 걱정을 했다.
작업일지를 쓰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작업일지는 중간중간 물감의 개량이나 몇 번의 레이어 작업을 했는지, 그때의 결과는 어땠는지 스스로 체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성하고 있었지만, 최근 작성한 날짜도 꽤 흘러 있었다. 세상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는 걸까 라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쯤 일한 외주의 결과들은 모두 순탄했다. 디지털 매체로 판매되는 아이템들을 만들어 납품했던 것들이 모두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작자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앞세워 주진 않았지만, 포트폴리오로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과 비용을 주셨기에 그래도 내심 속으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프로젝트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오로지 예술을 할 때 벌 수 없는 돈을 벌 수 있음에 스스로를 괜찮은 상황이야 라며 합리화했다. 나는 가까스로 자리 잡은 프리랜서의 생활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내면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다고 프리랜서 생활에 불만만 있던 것도 아니다. 지겨운 직장 상사의 농담이나, 빈번한 회식, 자유롭지 못한 대화, 메뉴선택 등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회사 생활보단 프리랜서 생활이 더 적성엔 맞았다. 하지만 큰 차이점은 돈을 스스로 벌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최근엔 프리랜서 관련 법이 제정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며 그동안 3.3%의 세금을 제하고 벌어도 나오지 않았던 대출이나 여러 규제가 좋아질 것 같아 기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것들이 아예 없었기에 모든 것이 어려웠다. 또한 제대로 된 법이 없어 업체가 맘에 안 들면 돈을 입금하지 않기도 하는 불상사들이 있었기에 제대로 된 지급과 조금 더 큰 프로젝트들을 하기 위해 개인 사업자를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