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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반림 Sep 11. 2024

마침표 뒤엔 늘 여백이 있다

 가끔은 세상이 마치 우울하고 예민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지만, 꾸역꾸역 버텨내니 세상이 나에게 보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동안 세상에 많은 것을 바랐다. 물질적, 명예적 욕심을 세상이 보상해 주길 바랐고 어쩌면 더 나은 삶에 집착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억지스러운 욕심의 해결책을 구해주진 않았고, 조금 더 비우고 조금 더 인내하길 바랐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나의 꼿꼿했던 자존심을 꺾었고, 이때도 내가 바라던 것은 그저 공모전의 결과와 상관없는 연락이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해 포트폴리오를 완성했으니 그저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공모전은 사실상 20개 정도 보내면 1~2개 정도의 회신이 올까 말까 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어 고작 한 개의 공모전에 지원한 나는 기대 따윈 하지 않았다. 역시나 일주일간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저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에 만족하며, 공모전이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하지만 인생은 재미있게도 최선을 다한 뒤 포기하려고 할 때 그때야 변화가 생긴다. 모든 분야에서 잘된 사람들의 스토리를 보면 대부분 그러했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만두려고 했어요.'와 같은 내용을 들을 때면 왜 한결같이 마지막이다. 생각할 때 변화할까, 의문이 생겼지만, 그것이 세상이 이치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나에게도 최선을 다한 뒤, 머릿속에서 배제하고 있을 무렵 그제야 연락이 왔다. 세상의 이치가 나에게도 기회를 준 셈이다.


 아직도 정확히 그때의 기억이 난다. 전화는 오전 11시가 막 지난 시간에 울렸다. 다행히도 일전에 미리 저장해두었기에 약간의 전화 포비아가 있는 나였지만 문제없이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의 내용은 '1차 합격.'이었다. 아직 2차 미팅을 통한 최종 결정까지는 결정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최선을 다한 나의 작업물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2차 미팅이 남아있긴 했지만, 작업을 하며 모든 것을 쏟았기에 다른 좋은 말을 연습하거나 꾸밀 수 없어, 그저 마음 편히 시간을 보냈다. 있는 그대로 했던 내용을 잘 전달하고만 와야겠다는 목적으로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 역시나 시간은 앞에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다가온다. 평소 현장에 도착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긴장을 안 하지만 그전까지는 엄청난 긴장을 하는 편이었기에 그날도 역시 속이 매스꺼웠다. 도착지 근처를 다 와 갈 무렵 너무나 큰 규모의 그곳은 나를 압도했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도 없는 법이다. 들어가기 전 나는 뒷일 따윈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민망한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대충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은 몇 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고 가장 큰 전시장에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보단 조금 작은 곳에서 전시하는 것이었다. 최근에서야 작업을 다시 시작했던 탓에 큰 전시장이 아니라는 소식에 연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팅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가벼운 형식의 대화방식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나의 취향을 알려고 하는 질문들이 가득했다. 평소 눈치가 빠른 편이기에 그 질문들의 의도를 금방 파악했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얘기를 나눈 뒤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종료됐다. 나는 이제 나의 남은 물음표를 모두 던지고 온 셈이다. 이젠 결과를 결정하기보단 그저 현실을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힘듦을 주던 외주 일들은 그날만큼 나에게 긴장을 덜어주는 요소로 발전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시를 진행하자는 연락을 받았고 그다음 주 바로 전시를 진행했다. 물론 나는 그저 신진 작가이기에 이름도 없는 편이었지만, 워낙 전시장이 유명했던 터라 첫날부터 사람이 하나둘 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방문해 주는 사람들에 감사함을 느꼈고, 최대한 밝은 얼굴로 대했다. 상주를 하면 참 궁금하다. 도대체 내 작업을 보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무엇을 느낄까, 그것을 공유해달라고 말해볼까 등 반응이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현상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으니 묻지 않았다. 전시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어느 날 전시장 한편에서 누군가 내 그림 앞에서 우는 모습을 봤다. 나는 휴지가 있었지만 나와 처지나 생각이 공감된 그 분의 감정을 깨트릴까 휴지를 주지 않았다. 가끔 내 작업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작위적이라 느꼈지만, 그 분은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기에 진짜라 믿었다. 하루하루 인상적인 장면들과 마주하니 2주라는 시간을 훌쩍 지났다. 전시를 내리고 집으로 향하며 평소와 달리 만족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만족감을 느꼈다.


 그날의 전시는 나에게 훗날 눈부시게 창백한 날이었다. 알 수 없는 순수함이 나를 감싸안았다. 나는 그렇게 창백한 순수함에 따스함을 느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작은 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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