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반림 Sep 16. 2024

감정의 공존과 관계 속의 거리

 관계에서 말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뒤에 따르는 비윤리와 윤리 사이의 고민, 관점을 넘나드는 통찰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알기에 감당하지 않으려 입을 닫은 채 현실을 그저 흐르는 대로 아무도 나의 세계에 끼우려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기쁨은 중요성과 위험성을 뛰어넘는 감정이라는 형태의 드러냄이었다. 자신의 1퍼센트의 이야기만을 했을 뿐 더이상은 굳이 하지 않아도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휘둘려 타인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것에 신기했지만 그들의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임은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정과 존중이 공존해야 한다.


 저마다의 감정의 형태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감정을 쉽게 존중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느 정도 스스로 통제해 어려움이라는 단어를 2순위로 밀어 넣어야 가능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인정하는 것만큼 진실한 존중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내면의 고통이었지만 나의 온전한 생각 하나로 타인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내면의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다.

 그들은 나의 단순한 말들 덕분인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길 원했다. 예를 들어 살아온 환경, 생각하는 것 이외에도 일상을 공유하는 진정한 사회적 가족을 만들어 노력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부담스러웠고, 정말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의 과정을 거쳐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걸러냄'이라는 과정이었고, 전체가 아닌 요약된 내용을 공유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걸러낸 이야기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쉽게 실망했고, 마음의 정도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속도에 맞추기 위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서운함 혹은 안타까운 표정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기에 나의 닫힌 마음의 문을 더욱 억지로 열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내면은 나에게 '굳이?'라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저 인간으로서 시각화된 현상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때 관계라는 것이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 처음으로 여겼고, 동등한 속도와 동등한 입장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온 게 너무 달랐다. 그들은 다소 화목한 가정에서 나름대로 적당한 고통만을 받고 살아왔다. 그와 달리 나는 그다지 화목한 가정에서 살았던 기억이 없으며, 항상 자립을 위한 정신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이곤 했다. 나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편이었고, 그들은 그다지 하루하루도 걱정하지 않았다. 내심 그런 걱정 없는 모습에 열등감이 생겨 그들의 작은 고민은 다소 듣기 힘들었다. 더 이상의 동등함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것을 선언했다. 열등감은 나를 과거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저 행복해만 보이는 그들과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하기로 결심했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같이 경험하는 것이 사회적 가족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 여겼기에 그 경험을 중시했다.


 나는 그런 경험을 만들어가며 느낄 수 있었다. 공통점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키워드일 뿐, 일생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그것은 그 후 만들기 나름이었다. 우리는 그 나름을 위해 많은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다.


이전 03화 서운함, 안개 속의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