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반림 Sep 20. 2024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나

 결국 불어 터진 물집은 손쓸 수가 없었다. 모든 감정과 모든 이성은 갈피를 잃고 과부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도 관계도 모두 다 지쳐버렸다. 경험이 적었던 나는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었던 탓에 모든 것을 잃을 지경에 놓였었다. 전부를 잘하는 것은 당시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나에겐 그저 큰 숙제였고, 나는 놓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루가 무섭게 나는 전부 놓으려 애쓰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챈 그들은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에게 그저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였다. 결국 "괜찮다"는 그 말이 나를 더 무너뜨렸다. 스스로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순간에 들려오는 그 말은 마치 더는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을수록 괜찮은 척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많이 웃어보려 했고, 더 많이 견디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금씩 더 무너졌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속은 점점 더 깊이 갈라졌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괜찮다"는 말을 쉽게 던진다. 그 말에는 위로가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나오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마치 내 고통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치부하는 듯한 그 말속에서, 나는 내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무겁게 얽혀 있는지 혼자 감당해야 했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있는 내내, 나는 오히려 내가 느끼는 혼란과 고통을 더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 괜찮아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조차 그 말에 묶여버렸다. 그 사람들은 내가 괜찮아질 거라 믿었고,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니 결국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버티고 견뎌야만 했다. 그 '괜찮음'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나는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았고, 결국 나는 그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더 이상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속해 있던 그 모든 것, 나를 붙잡고 있던 일과 관계, 기대와 책임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괜찮다’는 그 차가운 말뿐이었다. 내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고, 나는 더는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떠난다는 선택이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것만이 내가 다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처럼 보였다.


 떠나기로 마음먹는 순간,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더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붙잡고 있기 위해 버티지 않기로 했다. 떠나는 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나를 계속해서 무너뜨리고 있던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내가 나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떠나기로 결심한 그날, 나는 나를 짓누르던 모든 책임과 기대, 그리고 '괜찮아야 한다'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가고 싶었다. 일도, 관계도, 모두 내려놓는 것이 나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마치 무겁게 엉겨 붙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남아 있고 싶었다.

이전 07화 미완성에서 주는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