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로 일을 구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SNS, 구인·구직 플랫폼 사이트, 카페, 블로그 등 다양한 방면으로 외주 일을 구할 수 있지만 단순 연락만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락을 통해 업체의 니즈를 파악하고 금액을 설정하고 미팅을 하고 일에 돌입하는 나름대로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내 생각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팅이라 생각한다. 미팅은 일종의 시험대와 비스무리한 자리다. 자신감도 보여야 하고 정말 진솔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며, 그날의 컨디션과 무관하게도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 시도 끝에 플랫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른 일을 구했고, 미팅 날짜까지 잡혔다. 미팅 날짜가 가까워져 나는 입고 갈 옷을 정하기 위해 내 옷장을 열었고, 새벽보다 어두운 내 옷장 속 옷의 색들에 당황했다. 검은색, 회색 같은 무채색 옷을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전부 검은색 옷…. 전부 어두침침하고 마치 그림자 같았다. 물론 그림을 그릴 때는 검은색 옷을 입어야 물감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아 자주 입곤 했지만, 머릿속 미팅의 장면에는 내가 검은색의 착장을 하고 간다면 왠지 모르겠지만 나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의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부터 미팅의 시작이었다. 당장이라도 검은색 옷들을 색이 있는 옷으로 염색시키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기술이 부족하기에 옷을 사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무채색을 놓아주어야 한다니 웃프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밝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 옷을 고르는 기준이 아주 독특하다. 약간의 스포티함이 있는 옷을 선호하고 디자인이 미니멀하지만, 디테일이 우수한 옷을 고르는 나만의 독특하고 정확한 기준들이 있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사는 기준이 까다롭다. 쇼핑을 나서면 항상 여러 곳과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을 추구하긴 하지만 결국엔 샀던 가게에서만 사는 상당히 비효율적 쇼핑을 한다. 이번 쇼핑도 뭔가 뻔한 가게에서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새로운 곳을 들리지 않고 바로 자주 가던 가게로 직행해 옷을 보기 시작했지만, 그 가게들의 특성도 나랑 비슷했다. 전부 무채색 위주의 미니멀한 스포티의 요소를 지닌 옷들을 판매하는 편집숍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미팅을 위한 옷을 사야 하기에 다소 밝은 인테리어를 풍기며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을 위주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소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꾸역꾸역 스캔해 갔다. 난생처음으로 베이지색 옷을 골라 거울에 가져다 댔는데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재빨리 내려놓으려 했으나 펜싱선수와 비슷한 속도를 지닌 직원이 재빠르게 내 앞에 나타나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라며 살 수 없는 것도 사게 하는 마법을 써버렸다. 직원은 쉴 새 없이 말을 걸며 나의 정신을 쏙 빼놓았고 그로부터 5분 뒤 내 손엔 쇼핑백이, 그 안엔 베이지색 옷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워 집으로 빠르게 향해 옷장에 산 옷을 걸었다. 그것은 원단인데도 불구하고 내 옷장에서는 형광등의 역할을 했다. 그렇게 나는 무채색 옷을 입지 못하게 되었다.
미팅 당일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궁시렁 거렸지만, 옷을 갈아입는 것이 더욱 귀찮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마무리로 가방을 둘러메고 걸음을 옮겼다. 인생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럴 때 꼭 불길한 것이 찾아온다. 그날도 시트콤처럼 마시던 커피를 옷에 흘렸다. 옷은 커피색을 아주 잘 받아들여 금색 얼룩졌다. 어쩔 수 없이 잘 보이려던 나는 오히려 더러워 보이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시간이 다 되어가 그냥 발걸음을 올렸고, 더욱 재밌는 것은 업체에서 나를 미술작가로 알고 있었던 터라 옷에 튄 커피가 디자인의 한 요소인 줄 알았다고 후에 전해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영상을 비롯해 여러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내 옷의 상태와 상관없이 대화는 잘 흘러 이번에도 별 이견 없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단기간 안에 이렇게 외주를 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돌아오는 버스길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여곡절이 너무나도 많아 기분이 약간은 다운되어 있었지만, 그날따라 날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구름에 눈을 맞춰 생각에 젖어 들어 하루의 정리와 현재 내 모습을 정리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버스 길에 올라 이어폰을 낄 때만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기에 그 지루한 버스 길을 가끔은 즐기곤 했다.
문득 그렇게 프리랜서 생활들만 한 달 가까이 하다 보니 스스로 '그림은 언제 그렸었지?'라는 약간의 질책과 합리화를 반복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일을 좋아했던 일로 바꿀 수밖에 없었는지 10분 공감했다. 나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상황들은 자신을 그 시장에서 스스로 버리는 것이었다. 나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미팅에 갔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간다는 현실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한 사람으로서 속상함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은 생각을 낳고 또 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 갈 무렵 버스에서 내렸다. 감정이 격해져 있던 나는 다소 격양된 모습으로 괜스레 가는 길에 물감을 하나 샀다. 그 물감은 나의 투쟁, 나의 본질을 잃지 않게 하는 '초심'의 도구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때에도 난 여전히 베이지 색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