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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확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돌 확 ㅡ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







*돌확






뒤란 한쪽

잡초 비집고 선 자리에

크고 묵직한 돌확 하나

비바람을 오래 견딘 얼굴로 앉아 있었다


빗물 고이면

잠시 하늘을 담았다가

해가 나면 조용히 비워내던 그릇

욕심도 없고

채움도 비움도 소리 없이 견디던 자리였다


어머니는 김장철만 되면

확 안을 정갈히 씻어

굵은소금과 무채를 한 줌씩 담아 놓았다

고춧가루가 발갛게 번지던 손끝이

돌결 위에 눌리면

살림의 기운이 천천히 배어들었다


된장 풀어 묵은지 씻던 날이면

돌확에 부서지는 빗방울 소리까지

한 끼의 숨결처럼 들렸다

지친 마음조차

확 안에 슬쩍 기대면

돌결의 서늘함이 뜨거운 속을 가라앉혀 주었다


어느 해 겨울

새로 산 스테인리스 통이 부엌 자리를 차지하자

돌확은 마당을 건너

뒤주 곁 그늘로 옮겨졌다

그 누구도 버리지 못했고

버려야 한다는 말도 차마 나오지 않았다


확 속에 아무것도 담지 않는 날들이 이어져도

먼지 닦아낼 때 손바닥에 느껴지는

미세한 오돌결 덕분에

삶이 버겁던 날들의 숨결이

아직 그 안에 담겨 있는 듯했다


가끔 소낙비 쏟아지는 날

확에 모인 물 위로

회색 하늘이 잠시 머무는 순간

묵은 시간들이 조용히 내려앉아

집을 한 번에 감싸는 듯했다


힘든 시절일수록

잘 견디고, 잘 버티고, 잘 이겨내던

돌확 같은 순간들이

사람을 오늘로 데려다 놓았다는 것

말하지 않아도

확의 깊은 침묵이 대신 알고 있었다



* 돌확 ㅡ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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