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벽
내가 정착한 곳은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익히 듣긴 했지만 실제로 와보니 과장 조금 보태서 영어를 거의 못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을만큼 한인도 많고 한국인을 위한 편의시설, 예를 들어 한인 마트나 미용실, 자동차 정비소, 각종 병원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한국인들이 많아서 미국이라고 마음 놓고(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아들에게 주의를 줘야할 지경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한인 1세부터 3세까지도 있고, 또 단기 연수나 주재원도 있다. 시민권자 또는 영주권자냐 아니면 잠깐 머물다 가는 연수자나 주재원이냐에 따라 대화 주제도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경우 초반에 받게되는 질문이 주로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나 "얼마나 계시다 가시나요?"인 경우가 많다. 나처럼 일단 '1년+a' 정도로 계획하고 온 경우에는 '금방 갈 사람' 카테고리에 속하게 된다.
내 딴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깊이 느껴보고 싶어서 동네 도서관이나 커뮤니티 센터 프로그램도 열심히 참여하고, 학교 행사나 자원봉사에도 적극 나서고, 짧은 영어지만 틈만 나면 학부모들과 스몰톡도 시도하며 지내고 있지만 어떤 큰 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입장에서야 주어진 시간이 1년밖에 안 되니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아이도 학교에 잘 적응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서 귀국한 뒤에도 소통하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곳에 계속 살아갈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리같은 단기 거주자가 정말 달갑지 않은 존재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루는 아이 학교에서 행사가 있어서 갔다가 같은 반 아이 엄마와 얘기를 나누게 됐다. 한국인이셨는데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아주 오래 사신 듯했다.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어린시절 곧잘 하던 한국어를 이제 다 잊어버리고 거의 안하려고 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한국인 친구들이랑 놀면 한국어도 좀 배우고 잊어버렸던 기억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집으로 한 번 초대하겠다고 하는데 그 뒤에 슬쩍 덧붙인 말이 뇌리에 오래 남았다. "친해지고 나면 한국으로 떠나니까 아이가 상처를 받아서..."
나라도 그러겠다 싶었다. 단기 거주자와는 거리 두기. 아이는 계속 이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마음 주고 친해진 아이가 얼마 안돼 떠나버리면, 그래서 마음 아파하는 아이를 보면 그 다음부터는 깊이 친해지지는 못하게 하지 싶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따로 플레이 데이트를 하자고 한다든지 집초대를 한다든지 하는 학교 밖 만남은 아무래도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교회에서 만난 아이 친구네 가족도 비슷했다. 아이가 한국어를 자꾸 잊어버려서 주말에라도 한국인 친구, 말하자면 내 아이처럼 아직 영어를 잘 못해서 한국어가 편한, 와 만나서 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또 그렇다고 깊이 친해지면 헤어질 때 혹시나 힘들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곳에 얼마나 있을 예정인지'가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을 하고 나면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쳐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기술이 하도 발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도 챗으로, 화상으로 만나며 우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주변에서 많이 봤다. 그래서인지 난 만약 아이에게 절친한 친구가 생기더라도 헤어짐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한 번은 우리가, 한 번은 그쪽에서 서로 방문하면서 (물론 큰 맘을 먹어야겠지만ㅎㅎ) 1~2년, 2~3년만에 만나면 또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 이어질 인연이라면 그렇게 가끔 만나더라도 진하게 우정을 이어갈 것이요, 아닐 인연이라면 좋은 추억으로 남겠지 싶다.
오늘 우리 집에서의 첫 플레이데이트가 있는 날인데 내가 더 기대가 된다. 아이 셋이 어깨동무하고 웃는 사진을 꼭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