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해마다 7월, 장마가 물러나고 수증기가 모두 승천하고 나면 집어드는 책이 있다. 창 너머 맹렬하게 파란 하늘과 뜨거운 열기를 마주하면 언제나 <설국>을 펼친다. 쨍, 하고 공기가 금 가는 소리가 날 듯한 시림에 7월의 무더위를 의탁하는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 -p7. 민음사.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몇 번을 보는 문장이지만 매번 어김없이, 곧장 서늘한 눈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3년 전, 처음 <설국>을 읽었을 때였다. 한 문장이 펼쳐질 때마다 눈앞에 까만 밤 하얀 눈 속을 달려가는 열차가 나타났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붓이 스쳐 지나가듯 산이 그려졌다. 한 계절이 지날 때마다 소리가 달라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묘사하는 세계는 투명하리만큼 맑았다. 그가 머문 눈의 고장 온천 마을은 수묵화같이 깊었다. 그가 창조한 세계의 사람들은 속이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다.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 다시 7월에 만난 <설국>은 그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서늘함과 뜨거움이 공존했다. 시마무라의 서늘한 허무, 고마코의 뜨거운 생명력이 태극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음과 양, 양쪽 세상에 각각에 존재하는 핵처럼 요코가 자리 잡았다. 오묘한 삼각형이 돌고 돌아 화려한 무늬를 그려냈다.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7월은 하늘도 땅의 습기를 품어줄 수 없었다. 그렇게 축축한 더위 속에서는 감히 <설국>의 서늘함을 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뼛속까지 한기가 스밀 듯 해 설국을 읽지 못했다.
올해 7월. 세 번째 습관처럼 <설국>을 손에 들었다. 이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생애도, 설국의 온천마을이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란 것도, 작가의 다른 소설 <이즈의 무희>의 카오루도 알아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만나는 <설국>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반가움 반, 식상함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 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p39
고마코를 만나면 댓바람에 헛수고라고 한방 먹일 생각을 하니, 새삼 시마무라에겐 어쩐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p55
시마무라에겐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공경이라고 애처로워도 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p64
무위도식하는 그에게는 일없이 굳이 힘들게 산을 걷는 것 따윈 헛수고의 표본인 듯 여겨졌는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또한 비현실적인 매력도 있었다. - P96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P110
허무하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아름다운 것이다. 헛수고같이 여겨지기에 순수한 매력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띠지를 붙이고 밑줄을 긋고 발췌 필사를 한다. 다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빼놓지 않고 필사를 한다. 또 다른 책은 몇 달째 긴 호흡으로 매일 인증을 하며 읽어가고 있다.
그뿐이랴. 몇 시간을 공들여 하얀 모니터에 까만 글을 새겨 넣는다.
이게 다 무슨 의미람.
밥이 나오나, 옷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커피값이 더 든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부귀와 영화는커녕 무수리 같은 삶을 쪼개어,
독백인 듯 , 공개 구애인 듯
온라인에 글을 쓰나.
대체 지극히 사적인 유희와 같은 읽기와 쓰기가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나.
흔히 말하는 '브랜딩' 하나 없이, 팔로워 없이 그저 자기만족 같은 이 행위가 나의 미래엔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불쑥불쑥 허무가 폭설같이 내렸다.
한번 폭설에 잠긴 마음은 까딱 방심하면 눈에 파묻혀 있던 전깃줄에 목이 걸리기 십상이었다.
그런 내게 시마무라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무심하게 속삭인다.
의미가 없으면 어떤가? 헛수고면 어떤가?
그것이야 말로 존재의 순수인 것이다, 하고.
그것이야 말로 삶이란 나무에 주는 단물인 것을, 하고.
지금의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책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고 해도 좋다. -p113
허무하기에 오히려 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