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생택쥐베리
by 별빛너머앤
불길이 일어난 한 화산 위에는 달궈진 팬 위에서 지글지글 기름 소리를 내며 노른자가 탱글탱글한 계란이 익어가고 있고, 은은한 온도로 타오르는 다른 화산에서는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겨 나오며 빵 한쪽이 노릇노릇 바싹하게 굽히고 있다.
불 꺼진 화산 역시 깨끗이 청소되어 빨강 하양의 체크 식탁보가 둘러졌다. 테이블 위 명랑한 노랫소리가 녹아 투명하게 빛나는 시원한 우물물이 유리병 가득 채워져 있다.
"이리 와, 아니 거기야 아니야. 여기야. 여기라고."
"아야! 조심해. 내 잎을 건드리면 어떡해!"
"그럼 뭐 말임메에~~~"
"내 발 밑에, 그렇지 그거야. 그거. 그거 먹어치워 버려."
"찾았다메에에에~~"
"그게 뭔지 알아? 엄청 무시무시한 거야. 잔뿌리 하나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다 먹어버려야 한다고. 들었어? 응? 응?! 아이 참, 뭐라고 말 좀 해봐. 답답해 죽겠네"
"다 먹었다메에~ 더 먹고 싶다메에에에~~~."
"으이구. 이 먹보 솜뭉치."
"야들야들 씹는 맛이 좋다메~"
"에취, 봐봐. 나 기침하잖아. 어서 와서 날 안아줘. 네 포근한 털로 나를 감싸란 말이야. 에취~!"
"가시 뾰족하다메에에에에"
태양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남자아이가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아이는 티키타카하는 한 송이 장미와 한마리 양을 곁눈질하며 슬며시 미소를 띤다.
'아저씨, 그거 알아? 난 이제 마흔네 번의 일몰 대신 마흔네 번의 일출을 봐. 아저씨도 일출을 본 적 있어? 일출은 말이야, 한없이 기쁨을 줘. 희망을 줘. 따뜻함을 주고.'
'아. 아저씨, 방금 웃었지? 아저씨, 내가 웃는 걸, 내 별이 딩동하고 반짝이는 걸 봤구나! 내가 아저씨를 보고 있듯 아저씨도 나를 보고 있어. 우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볼 수 있는 거야.'
'아저씨, 이제 내 별에는 바오밥나무가 자라지 않아. 아저씨가 그려 준 양은 아주 똑똑해서 장미를 먹지 않아. 그 양은 장미향을 맡을 줄 알아! 그러니 입마개를 그려 주지 않은 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주 끝, 멀리 실눈을 뜨고 아주 오래 바라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창백한 푸른 행성 하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아이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저씨, 고마워. 다음엔 아저씨가 내 별로 놀러 와. 기다릴게."
<The End>
지난 6월, 중국어 원서 읽기 모임에서 어린 왕자를 읽었다. 《小王子》
한 달간 매일 오전 11시 어린 왕자를 읽고 문장을 발췌하고 필사하고 나름의 번역을 하고 녹음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26장을 읽으며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울먹임에 제대로 녹음을 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쉬었다 다시 해야 했다. 마지막 27장을 읽고 차마 책장을 덮지 못하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에 새초롬하면서도 귀여운, 명랑한 대화 소리가 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리창에 낀 서리가 슥슥 지워지며 점차 바깥 풍경이 보이듯 무언가 눈앞에 그려졌다. 들리고 보이는 것을 받아 적었다. 어린 왕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의 어린 왕자 외전>이 만들어졌다.
국민학교 2~3학년 때였다. (아마도) 삼성 세계명작 전집을 열심히 읽었다. 이모네 오빠들이 다 커서 우리 집에 온 책들이었다. <소공녀>는 몇 번을 읽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는 소인국을 여행하는 꿈도 꿨었다. 어린 왕자를 보며 '이걸 보고 어떻게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켰다고 생각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린 왕자는 어린 내게 그렇게 잊혔다. 그러나 사는 내내 어린 왕자의 말들, 아니 정확히는 여우의 말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가령 '나를 길들여줄래?',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할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같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시시했다.
중국어 원서 읽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어린 왕자>는 그렇게 그렇고 그런 책으로 남았을 것이다.
매일 한 챕터씩 한 달간 천천히 읽었다. 외국어였기에 아는 단어도 사전을 다시 찾아야 했다. 단어 하나하나의 향을 맡으며, 문장과 문장 사이를 산책하며 보물찾기 하듯 이곳저곳을 들춰 보았다. 한국어로 옮길 때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해 더 깊이 느끼고 더 깊이 고민해야 했다. 결국 내 모국어의 부족으로 그 느낌을 다 못 살려냈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덕분이었다. 나는 <어린 왕자>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었다.
여우에게 오후 4시의 행복이 있었다면 나에겐 오전 11시의 행복이 있었다. 3시부터 행복해했던 여우의 의식처럼 커피 한 잔을 놓고 책과 노트와 펜을 펴는 의식으로 어린 왕자를 만났다. 때론 한 시간의 짧은 만남이었고, 때론 두세 시간의 여유로운 만남이었다. 길고 짧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일 하나씩 어린 왕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의 하루를 관통했다. 오늘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내가 새로이 느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린 왕자는 매일 내게 물었다.
한 달, 어린 왕자가 나를 길들인 것인지, 내가 들인 시간이 어린 왕자를 더 소중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왕자는 내게 사랑을 다시 느끼게 해 주었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를 일깨워 주었고, 존재의 이유를 물었고, 다정함과 다정한 태도를 가르쳐 주었다. 만족의 지혜와 떠남의 용기를 안겨주었다.
처음 어린 왕자를 만난 지 어언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어린 왕자가 나의 마음속 목소리이며, 그의 별 B612가 내 마음이란 걸 알았다. 이제 나는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별의 반짝임을 웃음소리로 듣는다. 일몰도 아름다움도 향유하지만 일출의 찬란함도 기꺼이 껴안는다.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소수의 책은 잘 씹어 소화해야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이다. 내게 <어린 왕자>는 맛보고, 삼키고, 잘 씹어 소화해야 할 그 모든 것이다.